예수님께서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 것이라며 예수의 사역을 폄훼하고
예수께 하늘에서부터 오는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호의적인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는데,
왠일인지 한 바리새인이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신 예수님을 점심 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노골적인 비난에도 바리새인이 태연하게 그를 식사 자리에 초대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악한 세대라고 평가하신 그 세대에 자신은 속하지 않는다고 자신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에 최선을 다하고 종교적, 영적으로 열심을 내어 살고 있었기에,
자신들을 외면하고 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에겐, 이 세대를 가리켜 ‘악하다’고 평가하신 예수님의 이번 질책이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이제서야 예수께서 현실을 깨달으셨구나,
예수의 곁으로 몰려오는 저들이 얼마나 악한 사람들인지 이제야 실감하게 되셨구나,
이제야 우리들이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얼마나 고군부투하며 살아왔는지 이해해주시겠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노골적인 비난의 가르침을 오히려 반갑게 여기며 그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초대받은 식사 자리에서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식사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이나 청결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손을 씻는 것은 오직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할 때 물두멍에서 손을 씻어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요구한 성전에서의 정결례 의식을 일상으로까지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부지중에라도 부정한 것에 접촉했을까봐,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식사 전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이들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정결례를 행한 것은 그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거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분리되어 깨끗해지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상징하는 예식이 바로 ‘손 씻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은 “나는 너희들만의 문제 해결 방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은 매우 명확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부정해보이고 이상해 보이면서,
그 속이 부정하고 부패한 것은 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것이냐” 하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만 거룩함을 관리하려는 그들의 형해화된 모습을 가리켜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속에는 썩어가는 시체가 묻혀있지만 겉으로는 잔디가 깔려있고 가꾸어져 있어서 그 속에 그토록 부정한 것이 묻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지적인 것이죠.
심지어는 스스로도 본인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하게 타락하였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또한 인정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이만하면 옳다고 자부하고 있는 상태,
곧 내면의 타락과 심각한 죄의 문제를 스스로의 수양과 정진으로써 정결하게 유지하고 있노라 자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또 한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율법 교사들입니다.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자신들까지 함께 매도된다며 예수님께 표현의 정확성과 분별성을 요구합니다.
이는 그들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를 악한 세대에 해당하는 죄인들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자기 인식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발 더 나가 바리새인들조차 부족하고 모자란 죄인들일지라도,
자신들은 구약의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이해하고 있기에 훨씬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한 세대’라는 예수님의 평가나 ‘평토장한 무덤’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에서 자유하다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양심이 제 기능을 멈추어 메타 인지가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야 말로 선지자를 죽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선지자들의 메세지 즉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왜곡하고 곡해하여 아무도 율법의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도록 만든 주범들이라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내면의 부패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평토장한 무덤을 만들었다면,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 율법 교사들은 선지자들이 전달한 계시의 내용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든 이들라고 비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죄의 기본 특성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대신 죽임 당하심으로써, 대신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속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여 도와주십니다.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고,
성령을 주시고,
의로움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아들됨까지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그리스도 안의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빛이 있어도 빛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주님은 성령을 보내어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열어
어둠을 어둠으로 여기고 빛을 빛으로 여기는 계시의 빛을 우리 내면에 채워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