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모여든 수만 명의 무리 앞에서 제자들을 향해 외식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시인’, ‘부인’, ‘답변’ 등의 법정 용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자 때는 이때라고 여겼는지 한 남자가 예수님께 유산 상속과 관련한 재산 분할 문제에 예수님의 개입과 해결을 부탁합니다.
유산의 분할은 율법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정당한 권리입니다.
장자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의 분깃을 가질 수 있지만 독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께 간청한 유산 분할의 문제는 정당한 권리의 보장을 요청하는 것으로서
그간 방법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던 그의 억울하고 간절한 심정이 잘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사람에게 대뜸 ‘탐심을 버리라’고 충고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산을 나누는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행동은 분명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의외의 모습입니다.

이 문제의 실마리는 이 사람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느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유산 상속의 정당한 분할 문제 때문이라면,
성문 앞 법정에 앉아서 훈련된 율법에 따라 민사 사건 등을 판결하는 공인된 랍비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공인된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랍비를 찾아가지 않고 대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일까?
그럴 리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더 손쉬운 방법,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 익숙한 방법으로 하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라고 그런 민사 소송을 왜 진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랍비의 판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기에, 혹은 충분하지 않았기에
승복할 수 없어 예수님에게까지 이 문제를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한 말씀만 해주신다면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는 그 형제가 혹 마음을 돌려 재산을 나누어주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그의 형제가 예수님 말씀 한마디면 따를 만한 사람,
즉 그의 형제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 중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야 가능한 부탁입니다.
즉 그는 자기 가족을 수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어 목적을 달성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겉으로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의 속에는 사랑이나 정의가 아닌 오직 탐심이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탐심으로 인한 재물을 둘러싼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 동원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한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어느 부자의 곳간이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저장할 곳이 없어서 남아도는 재물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곳간을 헐고 다시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추가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짓기로 결정한 이유는 여유 땅이 없을 정도로 이미 모든 땅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층수를 높이는 것뿐입니다.
이미 곳간이 가득 찰 만큼 부유한데도 불구하고 부자가 충분함을 넘고 넉넉함을 넘어까지 계속 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쉬고 즐거워하기에 아직 부족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만족이라는 것을 새로운 곳간이 가득 차게 되면 그때 누리게 될 미래의 일로 미루어두었습니다.
물론 오늘을 살아갈 양식으로는 충분하겠지만 부자의 관심은 온통 내일에 있습니다.
오늘은 안전하게 지나갔을지라도 내일은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안전하게 먹고 마시고 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곳간이 가득 차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놓입니다.
이는 부자가 인생의 만족과 안전과 평안이
하나님의 긍휼하신 통치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쌓아놓은 재물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내일의 만족을 위해 오늘의 만족을 희생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그의 생명을 오늘 거두어가신다면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내일도 평생 모아온 모든 것들도 다 의미 없이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쌓아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에 미련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의 안전과 운영과 통치를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에 기대한다는 것 역시 성령을 모독하는 일에 속합니다.
앞서 예수님은 성령 모독이란,
구원을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기대하고 신뢰하고 소망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셨는데,
나의 내부를 믿고 사는 게 아니라 외부의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모두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탐심을 다른 것으로 가리려 한다 해도 성령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여 사는 삶의 동기와 태도는
주님 앞에서 절대 가려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내일도 오늘처럼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시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주십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만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