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분할에 개입해달라는 어떤 사람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던 예수님은
눈을 돌려 다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침의 대상은 무리에서 제자들로 바뀌었지만,
내용은 여전히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대한 해설입니다.
형제로부터 유산을 얻어내야 한다는 사람은 그래도 받을 게 있는 사람이었으나,
제자들 중 대부분은 노동자 계급으로서 정말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제자들을 향해서도 재물에 대한 주제를 가르치시길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재물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대상을 가리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끼치는 부와 재물의 죄악된 영향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돈은 결국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왜곡시킵니다.
부유한 사람은 삶에 여유가 넘쳐나고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스스로도 ‘나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반면에 빈곤한 사람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자꾸만 위축되고 소심해지기 일쑤입니다.
스스로도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혹은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합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행동은 이토록 정반대로 나타나지만,
이 둘은 사실 모두 같은 양상의 죄악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돈에 목숨을 겁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돈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돈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은 부요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과 세상 나라 백성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목숨이 중요하고 몸이 중요하며 생명이 중요하다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모든 삶을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목숨을 위해 몸을 위해 하나님이 아니라 음식과 의복과 재물에 매달립니다.
먹는 문제에 사는 문제가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지 못하고, 먹고사는 문제에 목숨을 거는 일을
‘세상 백성들이 하는 일’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별하시고 대조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는 오직 생명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과 섭리하심에 달린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을 시들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기에(사40:8),
영원한 말씀 앞에서만 인간은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려고 만나를 주셨다고(신8:3)까지 말씀하셨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모든 만물을 운영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까마귀와 백합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부정한 동물인 까마귀도, 들풀처럼 짧은 기간 피고 지는 백합화도
하나님께선 그 짧은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인생 역시
살고 죽는 모든 부분을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운영하시고 통치하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부요하신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그 나라의 구현에 생명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때 ‘구하라’는 단어는 ‘간절히 빌라’는 뜻이 아닙니다.
‘추구하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가 이 땅에서 구현되는 데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은혜에 기반하고 있음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를 가르치셨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 부양하는 일야야말로
그 나라가 사랑과 은혜로 통치되는 나라임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는 구제하는 이로 하여금 겉과 속을 동일하게 행하는 순종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는 중이었습니다.
속은 썩었으면서 겉은 멀쩡해 보이도록 꾸미는 바리새인의 외식이나,
반대로 속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말하면서
겉으로는 사랑의 통치로 운영되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관심이 없는
입으로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의 외식은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나라를 위해,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바와 동일한 삶의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자녀들로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