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그곳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한 여자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대뜸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셨어도 그녀가 무엇에 묶인 것처럼 허리가 접힌 채 18년 동안이나 살아왔음을 이미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18년간 고통스럽게 묶고 있던 병에서 풀어주시자, 병에서 놓여진 그녀는 하나님께 감격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회당장은 화가 났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며 소리를 지릅니다.
하지만 회당장은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예수께 차마 얼굴을 붉혀 분을 내지는 못하고,
들으라는 듯이 무리에게 돌려 말합니다.
회당장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을 거스르는 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금지하신 일을 하다니!’
회당장은 회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이 일을 빌미로 회당장에게 책임을 물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민해진 회당장은 애꿎은 예수 곁의 무리들에게 분을 냅니다.
회당장이 화를 낸 이유는 분명히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지 말라’고 말씀하거나,
병든 자를 고치는 행동을 ‘일’이라고 분류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당장은 대체 왜 예수님이 구부러진 여자의 허리를 펴시며 18년 동안 괴롭히던 사탄의 메임에서 풀어주신 것을 ‘일’이라고 분류한 것일까요?
무슨 근거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판단하고 화를 내는 것일까?!
그것은 율법을 본래 취지와 다르게 과도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유대교의 독특한 종교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기를 거치며 유대교에는 유대교 나름의 관점에서 율법을 해석하여 모아놓은 ‘미쉬나’ 즉 ‘장로들의 전통’이란 것이 생겼습니다.
랍비들은 이 ‘미쉬나’를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하며 더욱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인 ‘미쉬나’ 중에서도 안식일 관련 금지법을 모아놓은 부분을 ‘말라카’라고 부르는데,
‘말라카’에는 39가지 종류의 금지법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장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말라카’에서 금지하고 있는 일을 예수가 범했다고 판단하고 흥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말라카’에서 조차 병을 고치는 것을 ‘일’로 분류하여 안식일에 금지한다는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말라카’에서 금지하는 것 중에 ‘묶인 것을 그 메임에서 풀어주는 일’이 있습니다.
회당장은 지금 예수께서 사탄의 매임과 사망 권세의 엮임에서 그녀를 풀어주고 놓아준 것을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로서 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소와 나귀도 안식일에 물을 마시게 하려고 풀어주면서,
이 여자를 풀어주는 것은 왜 안 되는 것이냐’며 회당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외식과 한계를 드러내시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자면 묶여있는 것을 풀어내는 행동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겠지만,
그러나 오히려 율법의 원래 목적을 감안한다면 묶여있던 것을 푸는 행동이야말로 안식일의 원래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일을 안 하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의 원래 취지에 더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안식일에도 일을 합니다.
진설병을 굽고 번제를 드리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는 자들의 사슬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일을 위해 멈추지 않습니다.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야말로 안식일에 제사장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부분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하시는 일이시기도 합니다.
지금은 구부러진 여자의 허리를 펴주시며 그녀를 인생의 비참함에서 풀어주시고 계시지만,
1년 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묶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의 공로로 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이 보인 모습이 외식과 위선인 것은,
그가 자신의 소유인 소와 나귀에게는 긍휼을 베풀었을 것이라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자기 소유의 재산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는 동일한 소속감을 가졌다면,
혹은 그녀가 그의 가족이었다면, 그녀가 자신의 딸이었다면, 회당장의 반응은 이렇지 않았을 겁니다.
스스로는 주를 위해서라고 생각했겠지만,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전혀 없는 위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저 경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자비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갈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으시고, 이처럼 계속해서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가르침을 계속하심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이란, 갈등을 피하는 거짓 평화를 누리게 함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피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돕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안식일에 일하는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선입견과 오해와 위선에 묶여있는 사람을 풀어주는 일, 해방하는 일, 자유롭게 하는 일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