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18년간 구부러진 인생을 살았던 여자의 몸을 펴주시며
그녀를 묶고 있던 사망 권세에서 풀어주시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본 회당장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에 놓아주고 풀어주는 일을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에 분을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유대교의 외식과 위선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두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매우 짧은 비유이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비유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겐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에 겨자씨를 심었다는 이야기와
어떤 여자가 밀가루 서 말을 누룩으로 한 번에 발효시키려고 시도한다는 이야기는
모두 상식을 벗어나는 이야기였습니다.
겨자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갈릴리 지역을 비롯한 낮은 평지 지역 곳곳에서 노란색 꽃을 피우는 한해살이 들풀입니다.
유대인들의 분류대로 하자면 땅에서 곧바로 잎사귀가 벌어지는 식물은 채소와 풀로 분류하고,
땅에서 줄기가 자라나 그 대에서 가지와 잎사귀와 꽃이 피는 식물은 나무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겨자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겨자가 유대인의 시각에선 나무로 여겨지고 줄기 또한 평균 3미터 정도까지 자라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겨자는 갈대처럼 가녀린 풀입니다.
겨자는 결코 새들이 깃들여 사는 백향목처럼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겨자가 백향목 나무처럼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성장한다 하더라도 문제입니다.
채소밭 한가운데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라난다면 밭은 망가지고 맙니다.
그리고 농부들이 그토록 쫓기 위해 애쓰던 새들이 나무에 몰려온다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자는 어느 길목에서든 잘 자라서 주변에 잡다하게 피는 들풀입니다.
이런 풀을 가리켜 잡초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 시대에 어느 누구도 겨자를 얻기 위해서
자기가 공들여 가꾸어 놓은 밭을 갈거나 파종하거나 재배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적은 누룩으로 밀가루 서 말을 한 번에 발효시키려고 시도한 여자의 이야기도 겨자씨 비유만큼이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밀가루 서 말, 즉 세 스아면 총 39리터의 양입니다.
반죽을 위해 물을 섞으면 부피와 무게는 더욱 늘어납니다.
여자가 아닌 남자가 반죽한다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반죽을 들어서 치댈 수 있는 무게가 아니기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놀라운 힘으로 반죽을 성공한다 하더라도 문제입니다.
그렇게 발효된 밀가루 반죽의 부피는 80리터를 넘기게 됩니다.
80리터 가까운 부피로 발효된 반죽을 구워 빵으로 만든다면 족히 100인분에서 150인분의 빵을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위해 저녁을 준비한다고 하기엔 비상식적으로 너무나 많은 양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누룩은 지금처럼 성능과 효율이 좋은 순도 높은 누룩도 아니었습니다.
주로 이전에 먹었던 빵에서 떨어진 빵가루를 빻아서 보관해 두었다가 새로운 빵에 섞는 방법으로 발효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룩의 발효 성능과 속도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만약 정말로 40리터의 밀가루를 발효시키려 한다면,
반드시 밀가루를 소분하여 여러 번에 걸쳐 발효시켜야 했습니다.
단번에 발효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모두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이요,
또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처럼 상식을 벗어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두고 하나님 나라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세상이 보기엔 미련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이는 일이지만,
가망 없고, 불가능한 일로 보이지만,
주님은 상식적이지 않은 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찮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벌레같이 추악한 존재를 구하기 위해,
지천에 널리고 널린 잡초 같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요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망을 죽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기에,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납득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심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을 부수고 임재합니다.
마치 사무엘을 향해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떼쓰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간절히 메시야를 원했지만,
그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복자로서의 왕을 원하던 유대인들의 탐욕으로 가득 찬 기대를 부수고,
스스로를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의인들이라 자부하던 확고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순종한 만큼 복 받을 것이라는 탐욕을 부수고,
기도로써 하나님의 뜻을 내 뜻대로 바꿀 수 있으리란 오만이 무너지고,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 확신하는 교만이 부수어지는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임재합니다.
우리 안에 가꾸어진 상식을 망가뜨리는 이 파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타락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부수어내시고,
우리의 죄성이 믿고 싶은 하나님이 아닌, 믿고 싶은 천국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통치 앞에 우릴 세워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