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베뢰아 지역을 돌아 갈릴리 지역까지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시는 중이었습니다.
눅13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방문하신 성읍들과 마을들은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목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이 여정은 모두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쉬지 않고 전진하십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대뜸 ‘구원을 받을 자가 적으니이까’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해왔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바라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로서,
로마의 압제와 억압의 굴레에서 민족을 구원할 제국의 통치자로 기대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그간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삐뚤어진 상식에서 발원한 메시야에 대한 오해와 곡해를 부수시는 가르침이었으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들의 기존 상식을 변개하여 절충하려 시도할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도 그런 연장선에서 던져진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기대와 어긋나고,
한술 더 떠 하나님 나라가 출범하면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 교사들마저 예수께 책망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들의 생각과 기대와 전혀 다르게 임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그저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사람이 매우 적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소수의 인원에게만 베풀어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홍수로 심판하시던 날,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포함해 총 8명뿐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구원받은 사람은 롯과 그의 두 딸 뿐이었습니다.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출애굽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 중에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모세조차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남유다가 멸망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중 극히 일부만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상식의 절충 과정에서 고개를 들게 된 것입니다.
이는 실로 불안함입니다.
적은 수만이 하나님 나라로 말미암은 구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이 그 가운데 속할 수 있을 것인지 미지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조언하십니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모두가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씀까지 덧붙이셨습니다.
모두가 원한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들어가기 위해선 열심이 특심인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불안함에 기름을 붓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좁은 문에 들어가지 않은 너희들은 결국 문이 닫혀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불안을 넘어 절망스러운 선언이었습니다.

좁은 문이란 닫힌 문과 비교하자면 그래도 열려있는 문입니다.
하지만 활짝 열려있는 문도 아닙니다.
닫히기 직전에 빼꼼히 열려있는 문입니다.
언제든 닫을 준비가 된 문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이란 닫히기 전 마지막 기회의 순간을 말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기는 닫히기 전 빼꼼히 열려있는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할 순간입니다.
힘써야 한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고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싸운다, 경쟁한다’ 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경쟁하고 싸워서 이겨야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경쟁하지 않는 자, 싸우지 않는 자는 좁은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경쟁의 결과에 따라 좁은 문에 들어갈 순위가 바뀔 것입니다.
누군가는 먼저 된 자였지만 나중 된 자가 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나중 된 자였지만 먼저 된 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들은 싸움에서 경쟁에서 패배하여 나중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힘쓰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던 탓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친근하게 여기고 힘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어깨를 부딪치는 싸움을 이겨내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누구와 싸우느냐입니다.
누구와 경쟁하는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 입장권을 놓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유대주의와 바리새주의의 구원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경쟁은 누가 더 헌신했는가를 비교하는 충성 경쟁이 아닙니다.
누가 더 하나님 나라에 기여했는가를 따지는 공로 싸움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성령의 이끄심을 대적하는 옛사람의 죄악된 본성과 싸움입니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져야 이기는 싸움입니다.
내가 져야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패배한 나의 죄가 매달려야 우리는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악된 나의 본성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은 이 좁은 문을 함께 통과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통치와 무관한 나의 꿈과 야망, 욕망과 갈망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내 삶을 향한 제국주의식 통제 욕구가 포기되어야 우리는 좁은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마치는 때까지 우리로 힘쓰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