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여덟 줄 현악기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역대상 15장을 보면 ‘비파를 타서 알라못에 맞춰 노래하는 사람들’과
‘수금을 타서 여덟 번째 음에 맞춰 노래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 알라못이란 여자들의 높은음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덟번째 음에 맞춰 노래한다는 것은 아마 남자들의 중저음으로 부르는 노래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다윗의 절망과 깊은 우울을 대변하듯 낮은 음으로 노래하는 이 시의 내용과 분위기는 희망과 소망 없이 꺼져가는 촛불을 보는 듯 암울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수척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꽃이 시들어 꽃잎이 떨어질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스스로 쇠약해졌다고 말 한 만큼 다윗은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 밤마다 고통 중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어둠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다윗이 시편 6편에서 보여준 깊고 어두운 밤의 기도가 우리에게 생경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인생도 이런 밤을 겪고 있거나 한 번쯤은 겪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의 후반부에서 생기와 활력을 되찾는 시인의 반전 모습에 우리도 함께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셨으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악과 함께하실 수 없는 분이시니,
만약 다윗이 지은 죄악 때문에 분노하고 진노하셔서 그를 떠나신 것이라면,
시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해 자복하고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어야 하기에 그래서 전통적으로 시편 6편은 참회시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시편 6편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는 모습을 일절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시인은 사망을 언급할 정도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조차
자신의 죄에 대해 인정은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돌아오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시인이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억울하다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이나 원망 또한 없습니다.
오직 시편 6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뿐입니다.
다윗은 죽음의 문턱에서 느끼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인생의 절망 속에서조차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시편 6편에서 드러나는 다윗의 진정한 원수는 사망 권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가로막는 진정한 대적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입니다.
다윗은 지금 죽음의 위협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확고합니다.
사망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원망이나 억울함의 호소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신뢰하고 있는 다윗의 기도는
먼 훗날 있을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도 밤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지만,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이루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를 하시면서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다시금 확인하시며 신뢰하십니다.
이 기도는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마음을 어디서 배우게 되었을까요?
짐작하기론 밧세바와 다윗 사이의 첫아들을 하나님께서 치셨을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낳은 지 7일 만에 사망한 그의 아들은 할례도 받지 못하고 이름도 얻지 못한 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사실 죄는 다윗과 밧세바가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는 아들이 당했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죽어가는 듯 괴로워한 다윗은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과 훗날 그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실 그분의 마음을
아들의 죽음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진정한 원수인 사망 권세를 이겨내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결코 다윗은 아들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슬픔 가운데 익사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음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종종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실패와 좌절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윗이 익사할 것 같은 슬픔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바꿉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내 뜻대로 아닌 주 뜻대로 이루시길 기도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