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날 예수님은 초대받은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수종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자리에 모여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합당한지’를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에 의해 낮은 자리로 이동하게 될 경우 당하게 될 창피함을 떠올리게 하시며
‘차라리 처음부터 가장 말석에 앉는 것’이 지혜로운 것임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이번엔 잔치에 초청하는 자의 상황에 빗대어 비유를 이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초대할 땐 차라리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와 저는 자와 맹인들 말입니다.
그들은 감사의 마음 외에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친척과 이웃, 갚을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잔치 주인을 다시 초대해 갚을 수 있으니 두렵다고 비유하셨습니다.
비유란 언제나 공감을 바탕으로 합니다.
공감을 바탕으로 그것을 비틀어 진리로써 폐부를 찌르는 가르침이 바로 비유입니다.
그런데 초청자를 다시 초대하여 갚는 것이 어째서 공감할 만한 두려운 일이 되는 것일까요?
서로 돕고 이를 돌려주며 갚는 선순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선순환이라면 말이지요.
당시 사람들에게 잔치 자리에 다시 초대를 받는 일은 설마 하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은 많지만, 잔치의 상석은 언제나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베풀었던 잔치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상석에 앉지 못했거나 혹은 더 낮은 자리로 이동해 앉아야 했던 사람들 중에
‘혹시 상심한 마음을 가지고 앙갚음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잔치 자리에 모르고 갔다가 자칫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낮아지는 되갚음을 당하여 창피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다시 초대할 일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로써 은혜에 대한 갚음이나 섬김의 선순환을 경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갚으려는 사람들의 은밀한 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심입니다.
가난하고 다리 저는 맹인과 같은 사람들은 받은 것이 은혜이든 원수이든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이든 원수이든 갚으려 하는 사람들, 그들은 갚을 것이 충분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갚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겐 은혜도 일종의 지불의 영역입니다.
노력한 만큼, 순종한 만큼, 헌금한 만큼, 기도한 만큼 형통하기를 기대합니다.
지불했으니, 자신들은 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복 주실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봉사와 헌신이 부족해서, 기도 시간이 적어서, 헌금이 적어서 위축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불한 것이 적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은혜를 지불로 생각하는 상호교환의 세계관, 기브 앤 테이크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과 욕심을 버리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갚음을 의무로 생각하고, 자신의 공로에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잔치의 비유 속에서 사람들이 잔치 참여를 거절한 이유는 저마다 달랐습니다.
누구는 땅을 샀고, 누구는 소를 10마리 샀고, 누구는 장가를 들었답니다.
하지만 이중 그 어느 것도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아쉬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땅을 사고 소를 10마리 살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먹을 것 때문에 잔치 참여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잔치를 거절한 이유는 그들이 잔치에 참여하여 얻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 잔치를 베푼 사람이 임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잔치의 초대자를 다만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는 ‘나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를 높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브 앤 테이크의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불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인물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게 이익이 발생하는 동안 상냥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 사용 가치가 있기 때문에 유익한 동안에만 공동체 속에 함께 합니다.
그러나 수가 틀어지면 돌변합니다.
그제야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위해 잔치를 베푸십니다.
주인을 사랑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와 함께 즐거워하려는 사람들만이 이 잔치에 참여합니다.
갚음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사랑은 그 은혜를 파이프처럼 흘러가게 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들, 즉 다리 절고 맹인으로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그 기쁨에 함께할 사랑의 대상들로 새로운 관계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갚음을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흘려보내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