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몰려나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투덜댔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예수가 정말 메시야라면 부정한 죄인들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순결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격려하며 함께 하셔야 했습니다.
율법에서 부정한 것을 구별하라고 하셨으니 부정한 사람들 또한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수군거리는 근거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도, 그에 대한 실천도, 순종에 대한 열정과 열심까지,
그 어떤 부분에서도 그들은 스스로 평가해 보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누가 보아도 자격 없고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시며 그들을 인정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불만을 쌓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세 가지의 비유를 연달아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잃은 것을 되찾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환희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누립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비유인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되었을 때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내며 그 기쁨에 동참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건 바로 법 없이도 살 것 같던 맏아들입니다.
이 비유 속의 첫째 아들이 바로 죄인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기보다 분노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들으라고 비유를 가르치시며 이들에 해당하는 인물을 등장시키심으로써
그들 스스로는 인정하고 있지 않던 죄성을 깨닫게 하려 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 역시 둘째 아들처럼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요구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장례 후에나 나눠 받을 수 있는 유산을 요구하던 패륜아 둘째 아들은
아버지는 혐오하면서도 아버지가 가진 것만큼은 간절히 원하던 아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첫째 아들은 겉으로 보기엔 착한 아들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근면하고 성실하며 순결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속 한번 썩여본 적 없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와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식에는 첫째 아들답지 않은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리고 이제껏 그래본 적 없던 맏아들이 있어야 할 위치를 고의적으로 이탈합니다.
고의적으로 잔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아버지와의 불화를 사람들 앞에 공론화하고
자신의 정당함과 아버지의 부당함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려 합니다.
아버지의 비정하고 삐뚤어진 편애 때문에 자신이 해왔던 모든 순종과 공로와 효도의 행위가 모두 무시당했다고,
그래서 자신은 너무나 억울하다고 소리 지릅니다.
첫째 아들은 자신이 마땅히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자격이 있고 권리가 있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 생각에 아버지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이미 자신의 몫을 받았고 그것을 모두 탕진해 버렸기에,
남아있는 재산은 모두 첫째 아들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동생을 환영하며 자신의 몫에서 송아지를 잡았다는 생각에 화가 난 것입니다.
동생이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들여진다면,
이후 아버지가 죽은 후에 나눠질 재산은
결국 동생이 더 많이 나눠 가져간 것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는 데까지 계산이 닿게 되자
견딜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듯 분출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다 내 것인데, 저 불공정한 아버지가 동생에게 부당하게 자기 몫의 재산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의 이러한 분노는 그가 했던 모든 순종이 아버지의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진 것만을 원하던 패륜적 모습 그대로입니다.
첫째 아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여전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야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상대로 공정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그에게 아버지는 이미 죽은 존재와 다름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함이 아닌 아버지가 가진 것을 사랑하는 그는 둘째와 다를 바 없는 패륜아요 혐오스러운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껏 누리고 싶어 불순종으로써 아버지 떠났었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마음껏 누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이유는 정확하게 동일한 사특한 위장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악랄한 동기를 순종의 모습 뒤에 은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이 정말로 정당한 줄 알기에,
자신을 피해자로 보이기에 힘쓰며 부당한 대우로 인한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래서 더 가련하기까지 합니다.
주님이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시니, 말로는 스스로 죄인인 척하지만
정작 진짜 숨기고 싶은 죄악은 뚜껑을 덮어 은폐시키고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아버지의 잔치 바깥에 있기에 그 환희를 진정으로 함께 누려보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 스스로도 경멸하여 숨기고 싶은 죄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절망과 좌절과 분노가 아닌,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