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주일 누가복음이 아닌 여호수아 말씀으로 수련회를 진행하며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설교해주신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은퇴교수인 김지찬 목사님은 저의 은사로서 대학원 논문 지도교수님이었습니다.
‘주해에서 설교까지’라는 제목의 교수님 강의는 평생에 기억해야할 설교 준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임을 교수님께 배웠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의 말씀과 무관한 내용들을 설교라는 이름으로 쏟아놓고 있는 세태속에서
목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방향을 잡아주신 분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김지찬 목사님 설교는 다시 신대원생으로 돌아간 듯 제게도 참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여호수아 4장에서 하나님은 길갈의 열두 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되거든
훗날 그들의 자녀 세대가 길갈의 열두 돌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볼 때,
하나님께서 마치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던 것처럼 요단강을 가르고 건너게 해주셨음을,
하나님의 손이 강력하심을,
그 능력으로 가나안땅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그래서 궁극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려고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웠음을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수4:20-24).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40년 전 그들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땅의 비옥함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낙담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거인처럼 장대했으며, 철병거를 타고 전쟁하고, 높고 견고한 성벽을 쌓아 올린 요새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습니다(민13:33).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평가했습니다(민13:22).
가나안 7족속들을 몰아내는 것은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몰아내지 않고 그들 사이에 자리 잡고 그들의 이웃으로 산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대한 그들 사이에서 버티지 못하고 결국 삼켜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절망했습니다.
높은 진입장벽 때문에 얻어내지 못할 땅에 대한 실망과 지켜내지 못할 땅에 대한 절망으로 인한
두려움과 걱정에 빠진 그들을, 하나님은 광야로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생할 40년 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가나안땅 앞에 세우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선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었습니다(신1:39).
그리고 약속대로 하나님은 그 강력한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패퇴시키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의 능력으로 얻어낸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에 강하심을 전적으로 경험하고 의지하며 가나안 땅에 입성하였습니다.
길갈에 세운 열두 돌은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서 제대로 된 전쟁 한번 수행해 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승리를 약속하시며 먼저 승전 기념비를 세우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능력 없는 그들이 은혜로 얻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은 길갈의 열두 돌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기억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살게 된 그들은 어느새 가나안 땅에 살았던 이들과 동일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높은 성벽을 쌓고 병마를 기르고 성문에 빗장을 걸어 스스로 땅을 지키며 버티며 살아가려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을 뱉어내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그 땅에서 뱉어내셨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는 빗장 지른 요새의 최후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벽을 만든 것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성벽의 두께에 자신들의 평화와 번영이 달려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로 땅을 얻고선,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던 그들의 평가대로
그들의 자녀들을 그 땅과 문화가 삼켜버리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길갈의 가르침을 잊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빗장 도시 속에 삼켜지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이권을 지키려 마음속에 쌓아 올린 높은 성벽은 보호시설이 아닌 감옥이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지켜내는 땅은 이미 산 자들의 땅이(시27:13) 아니라 죽은 자들의 땅입니다.
한국교회에 심각하게 파고든 세속화의 물결은 우리 마음속에도 견고한 성벽을 세우고 빗장을 지르게 합니다.
고학력의 부유한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고학력과 부를 계승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모습은
약속의 땅을 얻고선 정작 자녀들에게 죽은 자들의 땅에 삼켜진 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만 같습니다.
자녀들은 정의의 빈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문을 닫고 다른 이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방법,
즉 죽은 자들의 땅에 삼켜진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로(계3:1) 살아가는 이들은 천국인 줄 알았으나 지옥을 살게 됩니다.
400년 후, 산 자들의 땅에서 뱉어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얻을 것이라”(마5:5)고 말씀하시며 땅의 회복을 가르치셨습니다.
온유한 자란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아나브’는 패배와 고통과 슬픔으로 고개 숙임을 말합니다.
40년의 광야 생활로 하나님 외엔 의지할 것이 없어진 이스라엘처럼,
내 편 하나 없어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던 모세처럼(민12:3),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는 사람,
하나님 외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주십니다.
땅을 지키는 비결은 성을 견고히 함이 아닌,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온유함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산 자들의 땅에서 그들의 분깃이 되어주십니다.(시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