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설교를 하고 설교에 대한 질문들을 받고 또 칼럼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잃어버린 양 비유를 각각의 설교로 나누었어야했다는 아쉬움입니다.
시간 관계상 생략했던 내용이 많았는데, 생략했던 내용들이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칼럼에서 설교때 시간관계상 다루지 못했던 내용들도 조금씩 다루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다보니 
칼럼이 아니라 또 한편의 설교 원고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쉬운 부분들은 주께서 다음에 또 유사한 주제를 성경 본문에서 만나게 해주시면 그때 다루기로 기약하며
겨우 겨우 내용을 요약하여 칼럼을 게재합니다.  ^^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고 투덜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연달아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잃어버린 죄인들을 되찾은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세리와 죄인들의 삶엔 회개가 없었습니다.
옳바른 삶의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심이 부족했고 순종이 부족했고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여기는 진지함이 부족했고
그렇기에 그들의 돌아옴은 뻔뻔하게만 보였으며
자격이 없고 한심해보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저런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저런 사람들과 함께 취급받는 것이 탐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에 비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함량 부족인 사람들에 대하여 투덜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들은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평가 기준을 부수어뜨리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미천한 양치기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존중받지 못하는 여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도록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 또한
그들의 우월감에 정면으로 도발하심이었습니다.
앞선 두 비유에서 예수님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되찾아 오는 장면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되찾은 상황을 죄인이 회개한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후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결과 또한 마찬가지로 회개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잔치에 들어오지 않고 버티던 맏아들이 혹시나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역시 회개일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첫째 아들과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회개의 모습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고 계신 회개란, 용서의 전제이거나 발단이거나 근거이지 않습니다.
양이 목자의 뒤를 따라 스스로 걸어 돌아온 것도 아니었고,
동전이 알아서 여주인에게 굴러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어깨에 메고 돌아왔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여자가 온 집안을 쓸어서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양들은 집단행동으로 몰려다니지만
정작 혼자 떨어지게 되었을 땐 각기 가고 싶은 곳으로만 향하여 도망칠 뿐 목자의 뒤를 순순히 따라오지 않습니다(사53:6).
그래서 낙오된 양을 찾아올 땐 목자들이 양의 발을 묶어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와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잃어버렸던 둘째 아들 역시 회개하여 제 발로 가정에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품꾼이 되어 아버지에게 그 손해를 갚아버리려 했으나,
그런 그에게 맨다리를 보이며 달려간 아버지가 그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그에게 사랑의 옷을 입혀 다시 아들로 삼아 집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비유에서 회개란 용서의 계기나 발단이나 근거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회개란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찾아내어진 바 되어 그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반드시 되찾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공감하는 동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열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가 베푸시는 은혜를 함께 기뻐하지 못하여 연약한 이들을 공동체의 소망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 회개와 거리가 먼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 소망과 기대가 아닌 둘째를 향한 질타의 마음은 결코 회개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으로 발견되어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의 삐뚤어진 패러다임 대신
주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소망의 패러다임을 갖게 됩니다.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자신이 첫째 아들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간 자기의 내면에 숨겨진 순종의 동기가 사실은 둘째 아들의 패륜적 동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제야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불평이나 불만이나 분노가 아닌 소망으로서 기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과 동일한 죄인인 내게도 동일한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째의 돌아옴은 첫째에게도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그렇게 되찾은 하나는 남아있는 아흔아홉에게 소망이요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과 소망의 기대를 느끼지 못하고 불편함과 불평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다면
그는 회개한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회개와 거리가 먼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비유가 이해될 리 없습니다.
그들에겐 그저 손해에 불과한 일들일 뿐입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후에 동네 친구들을 불러보아 파티를 벌인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녀의 터져 나오는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열 드라크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 드라크마는 결혼식 지참금으로써 결혼반지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과 언약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그저 하루 품삯 정도 가격의 가치일 수 없습니다.
가격이 아니라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격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야 그 기쁨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일도 그렇습니다.
가격을 생각한다면 쉽게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주저하다가 결국 포기하게 될 일일지도 모릅니다.
양치기를 마친 목자들은 목자의 뜰에 모여 함께 양을 지킵니다.
그러니 아흔아홉 마리 양을 대책 없이 내팽개쳐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다른 목자들에게 맡기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일은 목자에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곧 어둔 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늑대 무리라도 만나게 된다면 낭패입니다.
목자에겐 한 마리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가격으로 생각한다면, 가성비로 생각한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겁니다.
그러니 찾아온 양의 가치는 목자의 생명값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의 가치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옆 사람이 한심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가치로 보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 삶을 즐거움과 기쁨의 천국으로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