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시자,
그 자리에서 비유의 가르침을 함께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듣고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가르침에 그들은 전혀 동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재물의 축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상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그가 가진 재물의 부유함과 형통함으로 설명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물질의 부귀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왔는지를 증명해 주는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해 가난함이란 게으르고 미련한 자에게 닥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도움은 재물로 증명되는 것이고,
그들의 인생은 재물의 도움으로 건사 되는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겐 무척 가소로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나사로의 이름 뜻은 ‘하나님이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것으로 보아 그는 몸도 성치 못했으며 돌봐줄 가족도 없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집에서 버려지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려 합니다.
버려지는 음식들은 원래 부자가 사육하는 경비견들의 몫입니다.
나사로가 버려진 음식이라도 먹기 위해선 개들과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합니다.
다행인지 개들은 나사로를 적대시하지 않고 그의 상처를 핥아주기까지 합니다.
하다못해 개들까지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인생이니 나사로의 인생에는 정말 아무것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짐승마저 불쌍히 여기는 나사로였지만 부자는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제공한 적 없이 늘 짬밥을 던져주는 것으로 나사로를 대했습니다.
그는 부유할뿐만 아니라 세마포 옷을 입고 자주색 외투를 걸칠 만큼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가 가진 재물들로 말미암아 부족한 것 없이 형통했습니다.
그런 부자의 눈에 나사로는 게으른 사람이요,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 그 댓가로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받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생에서 늘 잔치를 벌였던 부자였지만,
내세에서는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오른편에 앉아 잔치에 참여합니다.
이생에서는 대문 앞에 버려지고 장례도 치르지 못해 성문 밖에 버려져 소각되었을 나사로였지만,
내세에서는 부자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버려져 고통스러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생에서 나사로에게 제대로 된 식사 한번 내어준 적 없던 부자는
내세에서 지옥의 고통을 잠시나마 면하게 해줄 물 한 방울을 구걸합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믿고 살아왔으나,
인생의 끝에 드러난 진리는 하나님의 도움은 재물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언급하시며,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비유 속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차이를 살펴보면 천국과 지옥의 구별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얼핏 보기에 두 사람의 차이점은 재물의 유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부자라서 지옥에 가게 된 것이거나, 나사로가 거지라서 천국에 가게 된 것은 아닙니다.
비유에서 강조하는 두 사람의 차이는 재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주께서 그를 무어라고 부르시는지에 달려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름이 있고, 한 사람은 그저 ‘부자’가 이름입니다.
그를 이름하여 부르시는 그것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를 ‘불의하다’고 부르심에 그 청지기의 정체성이 드러났듯이,
부자는 그의 재물을 빼면 무엇하나 남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그를 부르실 때 ‘부자’라고 부르십니다.
반면에 거지는 그의 ‘없음’을 정체성으로 여기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제로 하여 그를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부르십니다.
나사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행한 것이 없었지만,
그에게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의 정체성이 아니라면
그는 자기의 많은 소유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도우신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내세울 게 없다 할지라도 이미 복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고, 정체성으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것은
재물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부자는 이생에서 재물을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겼고 복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렇기에 억울함이 컸습니다.
나사로를 살려 보내서라도 가족들에겐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는 그래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 속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으라.”
모세와 선지자에게 들으라는 말씀은 그들이 살아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와 선지자란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합니다.
말씀은 살아서 좌우에 날이 선 검과 같이 우리의 심령을 쪼개어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우리의 도움이 누구인지를 각인합니다.
성경이면 족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은 언제나 성경을 통해 옵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분의 십자가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