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 즉 넘어짐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살면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성인들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특히 어린아이들은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의 넘어짐을 통해 걸음마를 배웁니다.
작은 아이들에게 있어 넘어짐은 당연합니다.
어른들에게도 넘어짐은 약간의 부끄러운 상황일 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답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에 있어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들이 잦을 수밖에 없다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합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 넘어지는 것은 단순히 아기들 걸음마 때 넘어지는 일처럼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제 막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한 ‘작은 자가 넘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그 작은 자가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나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죄에 대해 넘어지는 일들은 어린아이가 걸음마 중에 넘어지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될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도 넘어짐 나름이지요.
깨진 유리가 깔려있는 곳에서 넘어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산행할 때 절벽 근처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은 실족사로 이어지는 위험한 일입니다.
영적인 넘어짐은 죄의 삯인 사망의 바다에 그 영혼이 던져지는 일종의 실족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넘어지는 일이 아주 없는 건 불가능할지라도,넘어지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스스로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을 헛디뎌 실족사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실족하여 죄 가운데 넘어진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명령하심이도 합니다.
‘알아서 일어서겠지’ 하고 방치하는 것은 안일한 생각입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와 숨을 들이쉬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평영 킥이 뛰어나고 생존 수영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죄악의 짐을 지고 스올의 깊은 바다에 던져진 영혼에 대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죄 가운데 넘어져선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쓰러진 죄악 속에 방치되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악에 대해 경고하여 가르치고,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고,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작은 자들이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시키고
넘어져 있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명령이기에 용서하지 않는 자도 결국 넘어짐입니다.
넘어진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넘어진 자를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하라’는 이 명령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루에도 일곱 번 회개한다면 일곱번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는 완전한 수준의 용서입니다.
이런 용서로써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정도의 용서여야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진 것과 같은 그 작은 자’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그를 그 실족함에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이 명령 앞에 우리는 모두 순종하지 못해 실족한 자가 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에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지금 우리의 믿음의 크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그 누가 하찮을 만큼 작은 자를 위하여 사망의 바다에 뛰어들어 그 목에 묶여 있는 것을 끊어내고 그를 구원해 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제자들 중엔 없습니다.
사람들 중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죄의 삯인 사망의 바다에 던져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대신 바다에 던져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악의 멍에를 끊고 대신 죽음에 던져지셨습니다.
노아 시절 대홍수 때 사망의 바다에 노아와 가족들 대신 던져진 방주가 그러했듯,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대신 죽음에 던져지신 십자가 위에 뿌리내린 사람마다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답게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하는 작디작은 그의 제자들에게
‘믿음은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믿음의 비밀이란,
믿음의 능력은 그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대상이 우릴 위해 십자가로써 사망의 바다에 대신 던져진 바로 그분을 향한 믿음이라면,
그가 가진 믿음의 크기가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와 상관없이 믿음의 대상인 그분의 피가 그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작은 겨자씨가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박은 본성을 뿌리째 뽑아낼 것입니다.
검은 오디 뽕나무처럼 넓게 뿌리 내려 도저히 아무도 뿌리 뽑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내 마음속의 악한 본성과 주의 명령을 향한 저항이,
겨자씨만 한 믿음이 향해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완전히 뽑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바다에 심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의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작은 자가 아니라 세례 요한보다 큰 자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순종하는 자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