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가르치시며
‘인자가 올 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눅15:8).
인자가 올 때, 곧 심판의 날에, 이 땅에 남겨진 사람 중에는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심판의 날 하루도 보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눅14:22),
그 약속대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요5:24).
바꿔 말하자면 누군가 바른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 대하듯 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가 아니라 심판의 주로 만나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계속된 심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율법에 온전히 순종한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믿었습니다.
심판은 죄인들에게나 닥치는 것이니 의로운 자신들과는 상관없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예수께서 심판에 대해 가르치실 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게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했고,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여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 기도합니다. 
당시 외세인 로마에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요 로마의 앞잡이에 불과했기에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패한 종교계와 사회의 변혁 운동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한 순종에 서약한 사람들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 바리새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예수뿐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속셈을 아셨고, 그들의 죄악된 실체를 폭로하셨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바리새인들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세리의 기도와 바리새인의 기도 중,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착하고 선하게 살아왔음을 보증하시는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세리는 여전히 범죄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의롭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눈에 의로울 리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리나,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는 바리새인이나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이 기준이시면 그분 앞에서 의롭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세리의 죄악과 바리새인의 죄악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위장하여 의로워 보이려 하는 그들의 위선과 외식이 더욱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비유 속의 세리와 바리새인에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의로운 궤적에서 나는 차이가 아닙니다.
이 둘의 차이는 자신이 죄인인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가 아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애통해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시며 의롭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여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만을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바른 믿음을 주신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거친 생각과 불의한 속셈들이 가득함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죄인인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죄인의 특징은 자신이 괜찮다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혐오하고 멸시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 앞에 세우십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순종은 기만이요,
감사는 위장된 자기 의 일뿐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일 년에 한 번 요구되었던 금식을 매주 두 번씩 행했지만,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는 이들의 금식은 사실 율법의 요구와 관련 없는 허례허식으로서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구원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돌리려는 공로주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사람, 곧 바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자신을 맡길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 속 세리처럼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불쌍히 여김이란,
대속죄일 날 지성소 안 속죄소 위에 뿌려지는 피로써 백성의 죄를 대속한 재물들의 피가 유효해지는 예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 “힐라스테리온”은 대속제물과 속죄소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깨달아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구하는 자들은,
대속의 희생과 슬픔에 참여하는 흉내로서의 금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 보혈의 은혜에 동참하길 갈망하게 됩니다.
즉 회개한 자가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만이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