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시로써 하나님께 감사의 감격이 가득 담긴 감탄형으로 묻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하나님께 감사도 찬양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의 죄악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얻는 삼는 사람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확신 속에서 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은혜만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며 정체성의 근간임을 찬양합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합니다.
즉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혼란을 겪는 사람은 걱정과 근심 속에 번뇌와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은 흔히 외부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이라고 착각하고는 합니다.
빼어난 외모, 탁월한 식견, 압도적 영향력, 인정과 존경, 막대한 연봉, 내세울 만한 학벌이 정체성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고 하거나 인기를 끌려고 하거나 사랑을 받으려 하고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돈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는 나이가 되면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정체성이 무너집니다.
인정받는 것이 정체성의 근간인 사람들은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좌절합니다.
피부가 탄력을 잃으면 생기를 잃습니다.
외부적인 요소가 출렁일 때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의 혼란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외부적인 요소가 아닌 내부적인 요소에 집중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가진 감정의 심연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면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발견하는 감정의 중심에 자리한
나의 자아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사실 결코 의롭고 선하고 바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탐욕과 욕망이 응결된 폭력적으로 날뛰는 심해괴물일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결코 선한 것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험한 것이 드러나면 악인으로서의 정체성만 선명해질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과 죄성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은 다윗이 질문한 것처럼 정말 이해할 수 없이 의아한 일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사단 마귀의 구슬림에 넘어가 주를 배신하고 생명의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원죄의 전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생명에서 사망으로, 자녀에서 원수로 그 존재의 지위가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은혜를 바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 마주할 결론은 오직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원수 된 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것이지, 생각해 볼수록 의아할 뿐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 다윗의 질문은
‘저는 하나님의 원수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이런 제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인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아들로 보내시어,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심으로써 죽음을 겪지 않으실 존재가 기어이 죽음을 겪게 하셨습니다.
죄의 삯인 사망으로써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질서에서 떠나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은 언제나 질서를 거스릅니다.
질서에 대항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는 것이 당연한 질서이지만 질서가 사라지면 물이 바다가 아닌 육지를 덮습니다.
질서를 대항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와 질서를 거두어 그들이 바라던바 무질서에 버려두심입니다.
그리하여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었던 질서가 무질서로 되돌아가고,
물에서 육지를 구별해 내셨던 질서가 되돌아갔습니다.
그것이 그 옛날 홍수 심판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로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멸하시는 과정에서도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에겐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방주가 그들 대신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들은 방주를 딛고 바다를 넘어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대신 죽음에 던져진 인자가 우리의 살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에게 모든 정의의 진노를 쏟으시고 대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십니다.
다윗의 기쁨과 감사의 고백은 바로 이러한 은혜를 기대함에서 나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사람의 존재 이유와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의 실체가 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의 사랑은 우리 삶의 동기이자 목적이며,
그의 은혜는 우리 삶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가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