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는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할 때 잔인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즉 나와 내 가족과는 상관없는 문제이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안전한 곳이라는 확신이 생길 때,
사람은 타인에 대해 본성을 드러냅니다.
군중 속에 숨어서 돌멩이를 던질 때 사람은 잔인해집니다.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오는 안정감이, 힘겨움을 겪고 있는 관찰 대상의 상태와 격차가 커지는 것을 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과 희열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고 싶어 커튼 뒤에 숨어 돌팔매를 하고는 즐거워합니다.
로마 시대의 검투 경기나 그리스도인과 맹수의 대결을 관람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것은 이러한 심리를 잘 보여줍니다.
현재도 그렇습니다.
악성댓글은 익명으로 숨은 사람들의 잔인한 즐거움입니다.
그들에겐 타인의 곤란함이 그저 즐거운 관람이 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악할 수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관람이란, 스스로는 안전 속에 거하며 고난에 힘겨워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관객에게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빈곤을 보면서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클수록 그와 대비되는나는 괜찮다는 안도감 속에서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전쟁 영화를 보면서 관객석에 앉아 팝콘을 먹으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을 관찰하는 즐거움, 그것이 관람의 특징입니다.
아이들이 개미의 다리를 떼어내고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것과 같은 순수한 즐거움이 사람에게 있는 본성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분들은 전쟁 영화를 오락꺼리로 관람하기 쉽지 않습니다.
IMF
때 전 재산을 잃고 가족까지 흩어져버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어떤 분에겐 그 시절을 그려내는 영화를 관람석에 앉아 도저히 즐길 수 없습니다.
인생은 내 얘기가 아닐 땐 가쉽꺼리가 되고 즐거움이지만, 내 문제가 될 때는 정말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위로도 쉽게 건네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그 문제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건네는 가벼운 위로는 자칫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말씀도, 그 말씀을 풀어내는 과정인 설교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발현 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죄인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길 때 우리는 평안함을 느낍니다.
안정감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재미를 느낍니다. 감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씀에 등장하는 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라는 것이 느껴지면,
그 순간부터 마음의 평안은 깨집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불편하고 불쾌해집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강단에 목사님이 정말 성도의 개인사를 폭로해버렸기 때문이라면 그건 그냥 비극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실수 때문이 아닌 대부분의 경우, 사실 말씀이 다른 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도록 하시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전문영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전인격을 말씀 앞에 서게 하십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도록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말씀을 전하는 설교의 목적임을 느낍니다.
그것은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전 인성으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먹는 것입니다.
설교는 관람이 아닙니다.
나와 상관없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배의 시간은 그저 교양을 함양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우리의 인생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결코 가벼운 위로가 아닙니다.
전 인생으로 부딪혀오는 묵직한 위로이자 권면이자 초대입니다.
그 부딪힘은 나의 죄성을 박살 내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예배가 관람이 아닌 하나님이 부르시는 초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 앞에서 풀어나오는 말씀들이 가벼움과 잔인함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묵직한 몸쪽 꼭찬 직구로 던져지는 사랑으로 느껴지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