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여리고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직전에 마지막 성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목적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눅9:22).
그리고 이제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목전에 두고 예수님은, 처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할 때 가르치셨던 그 말씀을 다시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입니다(눅18:32,33).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버림받고,
이방인들에게는 고난받아 죽임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모두 아신다면 그런 미래를 피해 가시면 될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이루시겠다고 하시니,
그들은 도무지 이 말씀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선명하게 알아들었지만,
이 말씀의 의도는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이성적으로나 지성적으로 모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말씀이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이토록 답답한 현상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눅18:34).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말처럼,
밝히 드러내 주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은 제자들의 눈이 가리어진 것을 그냥 지나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영적인 어둠 가운데 내버려두신 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눅18:31).
버림받는 것도, 고난받는 것도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듯,
말씀을 듣고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 역시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성경은 죄인들의 특징을 ‘보아도 보지 못하는’ 맹인에 비유합니다(사6:8,9).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버림받고 고난받고 죽임당하시려고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영적 무지와 눈멂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임당해야 해결될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겪고 나서야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자신들의 무지와 눈멂 때문에 주께서 당하신 일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이 오기까지 제자들의 눈멂을 지나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버려둠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 위로 함께하시려는 은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의도를 시각화하여 보여주시려고
여리고 성의 어느 맹인의 곁을 의도적으로 지나치셨습니다.
그가 곧 소리 지르며 일행을 멈춰 세울 것을 이미 아셨지만, 짐짓 그의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에게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이거나 무시하셨기 때문이거나 유기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예수께서 그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십자가의 길 위로 부르시고 동행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맹인은 예수께서 자신의 코 앞을 지나쳐가시는 동안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일행들이 그를 지나쳐간 후에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어 알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늦기 전에 그저 소리지르는 일뿐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멈춰서서 그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전까지 맹인은 원래 길 옆에 벗어나 주저앉아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께서 서 계신 그 길 위에 주와 함께 서서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그의 ‘소리 지른 행동’을 칭찬하신 것이기보다,
그의 안에서 그를 예수께로 이끌어오신 분이 따로 있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맹인이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원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적극적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태초 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그를 예수께로 불러온 탓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 성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고 그를 따라갈 사람으로서 준비하시며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여리고 성의 맹인을 지나치신 것이 아니라,
때가 찬 경륜에 따라 부르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눈멂을 방치하시고 지나치시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향하여 십자가의 길로 그들을 부르고 계심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제자들의 눈은 떠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진실과 진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도 그렇게 열어주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야 성경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와 진정한 목적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십자가의 길 위에서 그와 함께 걷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