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예수님을 향해 웅성거리면서도,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자,
막상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면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잃어버린 백성들’을 되찾으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다시 한번 차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하여 비유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는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상황 인식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은 두 가지 비유가 하나의 이야기로 섞여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는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먼 나라에 다녀오는 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왕위를 받고 돌아오면 그의 왕위를 방해하던 반역자들을 색출해 사형을 집행할 것입니다.
나머지 다른 이야기는 오랜 시간 출타하는 주인이 열 명의 종을 불러
그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나눠주고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므나씩을 받은 열 명의 종들 중에는 한 므나를 주인에게 받은 그대로 수건에 싸놓았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이를 돌려주며,
주인이 상식적이지 않은 무서운 사람이라고 투덜대는 종도 등장합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얼핏 보기엔 서로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예수님은 이 두 비유를 각기 따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마치 실타래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서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들은 서로 때어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의 실타래로 엮여 있는 두 가지 비유 중에서,
나머지 다른 쪽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상황적 배경 역할을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의 이야기’입니다.
비유란 현실과 닮아 있어서 공감을 통해 이해가 되도록 하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공감을 넘어 조건 반사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혐오와 경멸, 미움과 반감의 저항 정신이 불쑥 고개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당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비유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이두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반대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헤롯은 로마에서 빌려온 군대로 그들을 진압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헤롯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의 세 아들이 이스라엘을 분할하여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을 때,
왕위를 이어받을 아켈라오가 정식으로 임명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난 사이,
유대인들은 차라리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게 해달라며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켈라오의 왕위를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켈라오는 유대 지역 분봉 왕이 되어 돌아왔고,
자신을 반대하던 삼천 명을 색출하여 모두 숙청하였습니다.
폭정을 일삼던 아켈라오는 결국 로마에 의해 실각되고 현재 로마 총독이 파견되어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헤롯 가문과 분봉 왕 아켈라오에 대한 혐오와 미움이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그들의 이러한 반항과 저항 심리를 제대로 건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고 반항심과 적개심으로 대할 것임을 비유로써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헤롯과 그의 아들 아켈라오를 미워하던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람들은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경멸하고 멸시하고 싫어하여 밀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불과 일주일 만에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 찬양하며 환호하던 그 입술로
‘십자가 형벌을 내리라’ 소리 지릅니다.

헤롯 아켈라오를 모티브로 한 비유를 이해하고 나면,
주인에게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놓았던 종의 심리가 이해됩니다.
그의 행동은 바로 손절이었습니다.
주인이 왕이 되지 못한다면, 금의환향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그를 그토록 미워하는 이들에 의해 가장 먼저 목숨이 노려질 사람들은
바로 그 왕의 이름으로 살아가던 최측근들일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받은 므나를 꽁꽁 싸매어 주인이 명령한 일들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원금 중에선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음을,
자신은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수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주인을 손절한 것입니다.
종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장사 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이름으로 장사해야 합니다.
대세가 기울어 모두가 그를 미워하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행동입니다.
바꿔 생각한다면,
그렇기에 그런 세태 속에서 주인의 명령대로 장사를 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은 또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것은 주인이 반드시 왕으로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리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인을 향한 사랑과 존경과 충성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인은 의리 있는, 존경과 사랑이 있는, 믿음이 있는, 충성이 있는 종을 칭찬하며
그에게 열 고을을 맡깁니다.
주님은 얼마나 남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장사했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의리와 사랑과 믿음과 충성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있는 자들에게 주와 함께 왕 노릇하며 세상을 섬기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