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의 삭개오 집에서 정비를 마친 예수님과 일행들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길을 출발하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은 이제 예루살렘까지 정말 나지막한 산 하나만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베다니 마을에서 맞은편 마을이란 감람산 중턱을 지나 위치한 벳바게라는 마을입니다.
이 벳바게를 지나면 감람산 능선을 넘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능선을 넘을 때 나귀를 타고 넘어가실 계획이었습니다.
걸어서가 아니라 짐승을 타고 가신다는 것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그만큼 특별한 일이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특별한 방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다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도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임을 인정하시는 행보입니다.
그렇기에 보냄을 받은 제자 둘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벳바게로 나귀 새끼를 데려오기 위해 앞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도 앉지 않았던 새끼 나귀를 데려오라고 명하시면서,
마을 어귀에 묶여있는 나귀를 그냥 풀어서 데리고 오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라 하십니다.
그게 끝입니다.
값을 지불하거나, 잠시 빌려달라고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애초에 주인이 맡겨놓았던 것을 찾아가는 것처럼 당연하고 마땅한 일로서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그냥 가져오라’ 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벳바게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묶여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풀어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황당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불러 세웁니다.
왜 나귀를 푸느냐는 당연한 질문입니다.
나귀의 주인과 가족들은 제자들의 뻔뻔한 모습을 보고 황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때를 위해 준비한 말로 대답을 합니다.
“주가 쓰시겠답니다”
그러자 주인집 사람들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나귀를 순순히 내주었습니다.
사실 제자들도 이 사람들이 왜 순순히 나귀를 내어주는지 알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상 예수님과 당사자들만 알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제자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던 때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며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다나엘만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벳바게의 나귀 주인들에게도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그들만 알고 있는 마음속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건드렸음은 분명합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마치 잠긴 문을 여는 열쇠처럼 작용하여 순순히 나귀를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준비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가 지나는 길 위에 깔았습니다.
이는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며 완전한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이 감람산의 능선을 넘어서는 순간 예루살렘 성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이 내리막길에는 이제 곧 예루살렘 성안에서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인파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왕의 행차입니다.
그러나 사실, 새끼 나귀는 이 중요한 순간에 왕이 타기에는 아무래도 볼품없고 초라합니다.
연약해 보입니다.
자고로 왕이라면 거대한 군마, 화려한 백마 정도는 타 줘야 합니다.
왕의 행차는 말을 타고 높은 곳에서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압도적인 정복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백성들과 같은 눈높이에서는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령이 서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야의 높이는 곧 권력의 높이를 상징합니다.
높은 사람은 내려다봅니다.
낮은 사람은 올려다봐야 합니다.
이 시야의 높낮이가 무의식중에 힘의 높낮이로 인식됩니다.
그러니까 왕은 말을 탑니다.
그리고 백성은 엎드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를 타면 돋보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높이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 나귀니라” (슥9:9)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기 위하여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와 같은 눈높이로 낮아지셨습니다.
왕이신 그분이 나귀를 타고 내리막길로 내려오고 계십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제자들이 탄성처럼 터뜨린 찬양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무엇인지를 부지 중에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요, 하늘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 찬양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실 때, 목자들의 뜰에 내려온 천사들의 찬양과 같습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그 길에 천사들의 노랫말이 다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 중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내려다봄이 아닌 눈 높이 사랑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왕으로 섬기게 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군림이 아니라 섬기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나귀를 타신 그 분이 우리의 왕이어야,
우리는 사랑과 존중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