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감람산의 비탈길을 내려가고 계셨습니다.
눈앞에는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입니다.
어느덧 성전과 골고다 언덕이 눈높이에서 보이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탄식과 함께 눈물을 터뜨리셨습니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동안 예수님은, 조금 전 제자의 무리가 찬양하던 내용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제자 무리의 찬양 소리가 침묵으로 바뀐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은 결국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너(예루살렘)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네 눈에 (평화에 관한 일이) 숨겨졌도다”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에 관한 일을 노래하던 제자 무리와
평화에 관한 일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예루살렘을 극명하게 대조하시며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게 궁극적으로 임하게 될 심판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원수들에 의해 목책으로 포위되고, 결국 성벽과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실제로 약 40년 후인 AD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벽과 성전이 모두 무너져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당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이 예언은,
성벽이 무너지는 굉음을 마치 돌들이 소리 지르는 것처럼 묘사하신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즉,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는 말씀은,
찬양의 소리가 멈추면 미물들이라도 일어나 주를 찬양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를 찬양하는 이들이 사라진다면 남은 것은 철저한 심판뿐일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심판은 단순히 성읍 하나의 파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임할 궁극적 심판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을 내다보시며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의 내리막길을 내려와 왕의 행차를 마중 나온 사람들의 환호 사이로 예루살렘 성의 동북쪽 문인 ‘양의 문’을 통해 성전으로 직행해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등 제사 제물들을 사고파는 상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장사를 세상의 속된 것, 하찮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청결해야 할 곳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부정한 곳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평소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장사로 비유하실 정도로 장사를 귀하게 생각하셨고,
애초에 성전이란 피비린내 진동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청결함과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예수께서 상인들을 내어쫓으신 이유는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예수님의 평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주기도문으로써 기도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란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생각과 상황과 소원을 모두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의 소원, 나의 뜻이 드러나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이루어지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전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제사 제물들이 흘리는 피는 모두 나의 뜻과 계획, 나의 욕망을 이루려는 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기도가 주의 뜻을 드러내고 그 이루어짐을 기뻐하는 목적으로 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의 뜻을 드러내고 나의 욕망이 이루어짐을 기대하며 즐거워하는 도구가 될 때
기도는 그저 거래가 됩니다.
제물을 사고팔듯, 욕망을 거래하려는 것입니다.
기도할 테니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라는 요구로서의 기도는,
백 원을 주며 빵을 사 오라고 협박하는 양아치 강도질 같은 일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실제로는 재물을 사랑하고, 탐욕을 섬기는,
실질적 이방인, 가나안과 같은 이들을 주님은 내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사람들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습니다.
아무도 죄의 심각성을 인하여 울고 있지 않았지만, 오직 주님만이 우셨습니다.
심판당할 존재들은 아무도 울지 않는데, 예수님만 우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25:8).
그러나 정작 백성들은 울지를 않습니다.
흘릴 눈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해 그가 우셨습니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비루한 인생들을 위해 주님이 그들의 자리에 들어가 대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평화의 일이 숨겨진 이들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시려고 주님은 그들을 대신하여 우신 것입니다.
추악한 이들을 향한 공감을 넘어 아예 그들의 자리를 대신 하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신 사람들 마다, 죄악이 씻겨지고 눈물이 닦여질 것입니다.
애통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눈물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눈물을 통하여 다시 평화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신부 된 교회는 단장한 새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