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집이 아닌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어쫓으신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성전에 가득하던 탐욕 대신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추궁하러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 공인된 것인지, 검증된 것인지를 따져 물어
백성들 앞에서 그가 가르칠 권한과 자격이 없음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압박하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물으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원이 이미 세례 요한으로부터 보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고 보증할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워진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며,
예수가 온 이스라엘이 오랜 시간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만백성 앞에서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권위와 자격을 논하려면 세례 요한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부터 논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에 대답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늘의 권위를 힘입은 진정한 선지자였다고 인정하면 예수가 메시아이심도 인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치 않는다면 백성들에 의해 돌을 맞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른다고 잡아뗍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추궁에 직답하지 않으시고 대신 백성들에게 한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고용해 포도원을 가꾸게 하고 먼 나라로 출타하였는데,
추수 때가 되어 포도원 소출을 요구하려 종을 보내었더니,
일꾼들이 세 번이나 주인의 종을 때리고 거저 보냅니다.
이에 주인은 장차 포도원의 주인이 될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포도원의 일꾼들은 오히려 상속자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이고
포도원을 자신들의 것으로 차지하려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를 대번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백성들의 반응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겁하고 비굴한 모습 뒤에 졸렬한 술수를 숨긴 비열함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 일꾼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켜 아들을 죽인 것은
한 번의 실수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이기 전부터 주인의 종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지속적으로 일으켜왔던 연성 쿠데타였습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부터, 바벨탑 사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애원하며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려던 백성들의 모습까지,
그리고 이후의 모든 인류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지속되던 죄의 근본적 문제는 모두 동일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살해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고자 하는 비열한 쿠데타의 수괴,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죄인들의 생각엔 하나님만 없으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이 아니시라면 세상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정녕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선과 악의 판별이 사회적 협약에 달려있을 뿐이라면, 시대마다 달라지고 문화마다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이라면,
누구도 개인의 삶에 간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 정체성 문제뿐만 아니라 심지어 범죄에 해당하는 영역까지도 오직 스스로 주인 된 자의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없다는 식의 주인 의식은 강바닥 돌멩이와 인생 간의 차이점과 우열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쿠데타 인생에 닥칠 심판의 결말을 선언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죄인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발견할 때가 되어서야 내 인생의 주인이 결코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르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무너져 내리는 예루살렘과 성전같이 그들의 인생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자가 깨어지고 돌 아래 깔리는 자가 부서져, 맷돌에 갈리는 가루처럼 흩날려지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이 된 인생은 그 무가치함과 무의미함에서 발생하는 허무함과 허망함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짓이겨지게 될 것입니다.
내세에서뿐 아니라 이생에서도 차륜처럼 돌아가는 심판의 맷돌 앞에
우리의 인생은 우울과 절망으로 치달아 가루가 될 때까지 완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의 이 비유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그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믿고 있는 비겁하고 비열한 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던 쿠데타의 수괴들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내란범의 최후는 사형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대신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버림받으셨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릴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에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교회의 머릿돌이 됩니다.
그 죽음을 기반 삼아 주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주의 구원 계획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 예수와 함께 삽니다.
내 안에 내란을 선동한 탐욕이 죽고,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의 죽으심 위에 서야 교회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