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내지 않아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예수님을 반란수괴로 엮으려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사주를 받은 정탐들의 시도가 좌초하자,
이번엔 대제사장 세력을 대변하는 사두개인들이 나섰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부활을 화두로 예수께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내세가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 이 땅에서의 형통과 부귀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내세 없이 이 땅에서의 삶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전부라고 한다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복과 구원은 당연히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부활의 문제를 예수께 언급한 이유는,
그들이 만약 부활이 없고 내세가 없다는 동의를 예수로부터 받아낼 수만 있다면,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다시 충돌해야만 하는 문제로 되돌려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논리 안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가 메시아요 진정한 구원자라면,
반드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건국하여 외세의 세력을 꺾고 로마를 무찔러
우상숭배의 상징과도 같은 인두세를 내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구원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를 잃지 않기 위해 이 땅에서의 구원을 입 밖으로 꺼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때가 바로 로마에 현행범으로 예수를 고발하고 체포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메시아의 구원이 반드시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논리적 단계에 예수를 동의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감히 부활의 문제를 꺼내 듭니다.
평소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어쩌면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견해에 가까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예수께 부활과 내세가 없음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사두개인들은
모세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 중 형사취수제, 즉 계대결혼에 대해 언급합니다.
만약 일곱 형제가 있는데 첫째가 아들이 없이 죽어 그의 아내가 남편의 동생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둘째도 죽고 셋째도 죽고 일곱 형제가 모두 죽게 되었다면,
이 여자는 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예수께 묻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순수한 의도로 던진 질문이 아니라 논리적 주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난다면 이처럼 결혼의 제도가 무너지고
여러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해 기존의 질서가 혼탁해질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부활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문제점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질서의 하나님 앞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사두개인들의 논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부활하게 되면 천사와 동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사와 동등하다는 말의 뜻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부활한 사람들에게는 이생에서의 결혼 관계가 재개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이 폐기된다는 의미를 담은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를 떠나 남자가 여자와 한 몸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폐기되지 않습니다(창2:24).
하나님의 말씀은 부활로서 오히려 완성될 것입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엡5:32).
즉 진정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신부 된 교회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부활은
결혼의 폐기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혼의 모습으로써 예수님과 성도의 연합을 구원의 실체로서 묘사합니다.
두 사람이 한 몸으로 연합할 때 아내의 모든 것이 남편의 것이 되고, 남편의 모든 것이 아내의 것이 되듯,
성도의 모든 죄악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십자가에서 해결이 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심으로써 얻어내신 생명과 의로움과 복락은
모두 주의 신부인 성도 것이 됩니다.
성경이 이토록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을 때 생명과 양분을 얻듯,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건짐받아 주의 거룩한 신부가 되는 구원은 누구든 예외 없이 부활하신 예수께 연합하여야 얻게 됩니다.
구약에 모든 신앙의 선조들도 예수의 부활에 성령으로 연합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믿음으로 연합하여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시 110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노래하며
“주께서 내 주께”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성자의 신성이 아닌 분명히 성자 인성의 다시 사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연합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어납니다.
신약의 우리가 2천 년 전 이스라엘 골고다 십자가 위에 연합하여 죄악을 씻어내고 그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면,
구약의 선조들도 2천 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그 죄를 씻고 그의 부활에 동일하게 참여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시간대를 살아가든 우리는 모두 예수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도, 야곱도, 이삭도, 모세도 모두
하나님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하나님의 영원에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지금도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지금부터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서 그 사랑을 찬양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