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며 수군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3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앞선 두 비유인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잃었던 것을 되찾아 기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마지막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음에도 함께 기뻐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은 첫째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친히 나와 첫째 아들을 다독이려 하지만 첫째 아들은 끝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들으라고 하신 이 비유에서 집중하여 보아야 할 등장인물은 그래서 둘째 아들이 아닌 바로 첫째아들입니다.
첫째아들의 입장에서 이 비유를 바라보아야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비유의 찐 주인공이자 빌런은 첫째아들이지요.
첫째아들은 그간 표현을 안 했을 뿐 아버지에게 서운한 것이 많았습니다.
본인이 아버지를 위해 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여겼습니다.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할 권리가 본인에게 있다고 여겼기에 돌아온 동생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눈에 동생은 아버지께 아들의 대우를 받을 어떤 것도 이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자신의 것을 빼앗는 존재에 불과하게 여겨져 적대시하는 혐오감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느끼는 바도 딱 그러했었습니다.
저 세리와 죄인들은 메시야가 열어줄 새로운 왕국에 시민으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살지도 않았고, 심지어 민족의 반역자로 로마의 앞잡이처럼 살던 사람입니다.
메시야의 새 왕국이 건설되면 제일 먼저 숙청할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이 의로운 바리새인들이 저 불경한 죄인들을 심판해도 모자를 판에,
타칭 역사상 가장 유력한 메시야 후보로 거론되며 기대를 모으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히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은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비유 속 첫째아들이 아버지에게 권리 의식을 갖고 공로를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것을 당연한 자기 것으로 여기는, 그래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나던 때와 다를 바 없는, 패륜이라는 점을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듯,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자격 있다고 느끼는 당당함과는 상반된 패륜적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죄인의 분명한 특징 중 하나는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사람은 내가 죄인임을 알고 부끄러워 주님께 가까이하기 어려운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내게 회개할 것이 어디 있는가 의아해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많은 권리를 가진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의 끗발이 서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감사와 감격으로 살게 합니다.
내가 베푼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 본전 생각으로 가슴 아파할 때,
우리가 주께 받은 은혜를 묵상하며 감사로 형제를 기다려주는 지체로 성숙하길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