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다가 끌고 온 사람들에 의해 잡혀가시기 전,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게 될 것을 생각하면 땀방울이 피가 될 만큼 두려웠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 공포심 때문에 ‘내게서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간구는 우리를 대신하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우리를 향한 진노의 잔을 십자가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이유로서 베드로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너는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겠지만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예수님의 당부는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지만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위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순간 다른 제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만은 멀찍이 떨어져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씩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미리 계획한 대로 일단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처음 그들의 계획은 유월절 명절 기간 동안 조용히 예수를 감금하고 있을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웠던 탓입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너무나 순순히 예수께서 잡혀오시자, 그들은 계획을 수정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민란 봉기의 불씨를 괴뢰도당의 수괴인 예수가 직접 나서서 불씨를 꺼뜨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칼을 뽑아 휘두르던 제자의 칼을 거두어들이게 함으로써 대항하고 저항하려던 세력의 기세를 스스로 꺾어버렸습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이렇게 맥없이 순순히 대적에게 잡혀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런 소식은 충격이자 배신감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그들은 로마에 정식으로 기소할 요량으로 원래 계획을 바꾸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예수를 이감합니다.
대제사장의 집으로 예수님이 끌려가는 상황이니
삼엄한 보안으로 말미암아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밖에 멈춰 섰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잡아간 대제사장 무리들 중 남몰래 예수를 따르던 이름 모를 한 제자의 권력에 도움을 받아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 뜰에도, 곧이어 가야바의 집 뜰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잡혀가는 예수의 뒤를 따라왔을까요?
예수를 탈출시킨다거나 변호의 역할을 한다거나 그가 예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옥에도 죽는 데에도 함께 따라가겠다’던 베드로의 말이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죽겠다는 것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처럼 생각처럼 그의 본능이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대문을 열어주었던 여종이 그를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인지를 물어보자,
베드로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가야바의 집으로 옮겨갔을 때도 어떤 사람이 알아보자,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귀가 잘렸던 말고의 친척이 베드로를 알아보자,
그는 또다시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였지만,
자신의 본성을 이겨낸다는 것은 진실한 각오와 결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째 부인하던 그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닭 울음소리는 천둥 같이 들려왔습니다.
닭 울음소리는 마치 자명종 알람처럼 베드로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퍼뜩 떠올리게 했습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개를 들어 예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마주한 예수님의 눈빛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실망? 원망? 분노? 서운함을 담은 눈빛이었을까요?
아니요. 아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할 것을,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도 이미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실패가, 그의 배신이 새삼스러울 게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눈빛은 분노나 실망이나 서운함이 담겨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빛은 확신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믿는다는 격려의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아닌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는 믿음의 눈빛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그가 돌이키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모두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의 눈빛입니다.
내가 기도했으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러니 너는 떨어지지 말고,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라는 위로와 당부의 눈빛,
즉 사랑의 눈빛입니다.
베드로는 이 눈빛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작정하신 사랑은 우리의 자격 여부와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영원히 변함없는 그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의 따스한 눈빛을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