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자마자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부당한 재판을 당한 예수님은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산헤드린의 질문에 시편 110편을 인용하심으로써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를 죽이기로 판결을 내리고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갑니다.
마음 같아선 단번에 예수를 끌어내어 사형을 집행해버리고 싶었겠지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산헤드린에는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습니다.
유대 지역은 파견된 총독에 의해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빌라도 총독으로부터 예수의 사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힘써 예수를 고발합니다.
하지만 로마법에서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사형을 이끌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말 없는 말 모두 동원하여 위증을 펼칩니다.
예수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다느니,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했다느니 하는 말들 말입니다.
이 모든 거짓말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20여 년 전 있었던 갈릴리의 반란 사건을 떠올리게 하여
예수의 혐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끌고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반란군을 이끌어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신 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현실과 일상생활에 무관한 복음을 가르치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삶과 인생에 변화를 받아
현실을 바꾸어가도록 그들의 삶을 통치하시는 실제적 왕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왕이 아니셨지만, 또한 진정으로 왕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변으로서 ‘네가 말하고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를 로마에 정치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예수의 대답은 왕도 아니고 뭐도 아니라는 한심한 답변으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느낀 산헤드린은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반란을 준비했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20여 년 전 있었던 갈릴리의 반란 세력을 상기시키기 위해 힘써 고발합니다.
하지만 갈릴리 출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기대와 달리,
때마침 유월절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갈릴리 통치자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었습니다.
과거, 갈릴리 출신 사람들을 자신에게 인도하지 않고 사형해 버린 빌라도 때문에 갈릴리 통치자로서 자존심이 상한 헤롯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일은 통치자로서 헤롯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둘 사이의 앙금을 풀어내고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예수에게서 기적이나 보고 싶은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예수를 대면합니다.
하지만 헤롯은 열심히 고발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기적은커녕 예수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어느 한 가지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헤롯은 왕들이 입는 백색의 빛나는 세마포 옷을 예수께 입히고 그를 조롱하며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내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헤롯 앞에서와 같이 일관적으로 모든 상황에 침묵하셨다면,
애초에 산헤드린 재판장에서도 기소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입을 열어 답변하셨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수를 죽일 계획을 실행하여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는 답변하셨지만,
헤롯 앞에서는 끝끝내 입을 다무셨습니다.
이로 보아 분명히 예수님의 침묵은 선택적이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침묵 기준이었을까요?
왜 어떨 땐 대답하시고, 또 어떨 땐 침묵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예수께서 산헤드린 재판에서 대답하신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부당한 위증들에 침묵하신 것도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헤롯에게 침묵하신 것 또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갈릴리 지역에 압송된다면 유월절도 지나가버리게 되고
로마의 직접 통치를 벗어나게 되어 십자가형이 아닌 율법의 사형 방법대로 투석으로 사형이 집행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감당하시려고 나무에 달려 죽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갈릴리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소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자 가장 열심을 내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에서,
주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의 길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이끌어가신 분이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지켜내기 위하여 침묵마저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고난과 환란에 침묵하시는 것으로 느껴질 때도,
주님은 침묵마저 주의 일을 이루시기 위한 열심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