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바리새인들의 시기와 비루한 대제사장 무리의 탐욕과 비정한 백성들의 손절과 비겁한 빌라도의 책임 회피는
결국 무죄한 자를 십자가로 내모는 비통한 결과를 빚어냈습니다.
법이 있으나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유대인들의 율법도, 로마의 법치도 사람들의 비뚤어진 심성과 죄악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인간의 타락과 죄악, 미련함과 비굴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스스로 구제 불능이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흥분한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납 조각이 달린 로마군의 채찍에 예수님의 살과 근육이 찢겨져 나갔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로는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이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골고다를 올라가던 중 체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넘어짐이 반복되자 결국 로마군은 몰려든 구경꾼들 중 한 명을 차출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이집트의 서쪽 북아프리카 구레네 지역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유월절 식사 후 예루살렘 성내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멀찍이 떨어진 시골 동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오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의 재판 과정도 일절 보지 못했고 영문도 모르는 채 차출되어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동안,
예수님은 곁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힘겹게 입술을 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곧 자식 없는 이를 부러워하는 날, 산이 무너져 덮치길 바랄 정도의 날이 닥쳐올 텐데,
푸른 나무에게도 이와 같이 한다면 마른나무엔 어떻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마지막까지도 수수께끼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한마디 한마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기에도 벅찬 순간에 말씀을 남기신다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시기 전,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위해 울던 나인성 과부에게도,
죽은 딸을 위해 울던 야이로의 가족들에게도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고, 아들과 딸을 되살려 그들의 품에 다시 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우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 울지 말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역시나 단순한 위로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은 비록 고되지만 죽음으로 끝날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에 대한 예언의 연장선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자녀를 낳은 자에게 화가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말씀은 이와 관련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얼마나 고될 것인지 너무나 자명하기에,
자녀들이 겪을 고난을 차마 보기 어려워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이 겪을 고난 동안 곁에서 함께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는 예루살렘의 심판만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지,
차라리 산이 무너져내려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달라는 요청을 할 것이란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른나무뿐 아니라 푸른 나무가 함께 겪어야 할 고난입니다.
푸른 나무에게도 힘든 시기라면, 마른나무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로 마른나무가 불타게 될 심판의 순간들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으로 열매 맺게 될 푸른나무인 우리에게도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고되고 힘든 시절이겠지만 피할 수 없이 겪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을 뚫고 살아가야 할 믿음의 자손들을 위하여 우리는 눈물 흘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셨던 것처럼,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 흘려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를 닮아감입니다.
그의 시선, 그의 마음, 그의 눈물, 그의 희생, 그의 생명, 그의 십자가.
우리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은 이미 훗날의 구레네 시몬을 보고 계셨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의 뒤를 눈물로 따르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고 계셨을 겁니다.
예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들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마다,
눈물로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눈물로 인내하며 양육해야 합니다. 눈물로 세워가야 합니다.
눈물로 세상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눈물 흘려 주를 닮아가는 이에게, 주의 고난과 함께, 사람을 맡겨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