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고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의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면
‘사람은 눈으로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으로 본다’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용모와 키와 같은 외모적인 부분이니 ‘외모를 본다’고 의역한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할 순 없습니다.
직역보다 의역이 이해하기 쉬운 장점이 있지만, 의역은 어쩔 수 없이 해석학적인 시각이 반영된 번역이라는 한계도 가지고 있게 됩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이 각각 평가의 기준이 어디에 달렸느냐 하는 부분에서 이해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은 객관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고, 중심으로 보는 것은 주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를 본다고 하면 평가의 기준은 대상의 외모에 달려있게 됩니다. 객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본다고 하면 평가하는 기준이 관찰하는 당사자에게 달려있게 됩니다.
즉 평가의 기준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준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결국 ‘사람이 눈으로 본다’는 것도 ‘중심으로 보는 것’ 만큼이나 관찰자의 주관적인 생각과 취향과 내적인 마음 상태가 반영된 관찰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성화 되어 하나님을 닮아간다고 할 때 우리의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중심으로 보는 것’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 조차 내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의 관찰이라면,
‘중심으로 보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요?!
지난 설교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중심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내밀하고 깊은 중심의 것을 모두 알고 계시는 그분의 지혜이자 하나님이신 성자.
그분을 통해서 우리를 바라봐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의 차이입니다.
악한 죄인의 본성, 그 내밀한 시각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중심을 삼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날마다 성화 되어 가고 있는 우리는, 그분을 닮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안의 무언가 착하고 인자한 심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말이 아니지요.
우리의 중심에 좌정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사랑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베풀었는데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 때 그래서 마음이 상할 때,
우리는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격 없는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를 바라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중심,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심으로 보아야만’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을 오래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예수로 바라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