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두 명의 행악자와 함께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살인과 반역을 일으킨 로마의 중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로마 군인들의 눈에 예수는 그저 희롱 거리에 불과했습니다.
희희낙락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며,
마시기 힘들 정도의 신 포도주를 예수에게 주어 골탕을 먹이곤 낄낄거립니다.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 것은 로마군뿐이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이제서야 혹시나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껏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병마에서, 귀신에게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며,
급기야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손아귀에서 백성들을 건져내겠다는 듯 행동하던 건방진 구원자가
결국 자신은 구원하지 못했다면서 십자가 위의 예수를 비웃습니다.
그들의 조롱대로 예수가 정말 비웃음거리에 불과한 인물이었다면, 그냥 비웃고 넘어가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밤부터 밤을 새우도록 공을 들여가며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혹시나 예수가 무죄하게 풀려나게 될까 봐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다 끝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안심하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의 심각성을 이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나 잘 알기에,
비웃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해 그들의 타락한 본성이 양심을 파괴하고 흘러나오는 웃음입니다.
하지만 웃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의 행악자입니다.
이들은 바라바와 함께 체포된 반역자들, 즉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우던 자유의 투사들입니다.
하지만 나름의 고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격한 행동으로 살아왔던 그들 인생의 종지부는 십자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의 좌우에 각각 못 박힌 이 행악자들에게 있어 예수를 희롱하고 비웃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비웃는 일이 아니라 애걸하는 일입니다.
한쪽의 행악자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라’고 애걸합니다.
이 부탁이 장난이나 조롱이나 비아냥이 아닌 진심이었기에
그래서 그의 요구는 그리스도를 향한 비방이었습니다.
이 말은 진심의 여부만큼 주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를 구원하라’는 요구는
‘당신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내려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과 내 계획을 이루어주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논리로 행하는 일종의 협박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지금 나의 위기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나의 종으로 여기고 자신이 주인이길 원하는 행태로서의 쿠데타입니다.
그의 요구는 악한 본성의 절박함에서 비롯한 비방인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두 명의 행악자 중 다른 한 편의 강도는 어느 순간 예수를 비방함에서 돌아섭니다.
그도 처음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를 구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요구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편 강도처럼 그도 역시 생명이 위태로운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돌아섰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진정성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동안의 삶이 하나님을 사용하고 이용하고픈 악한 마음의 발로였음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두 행악자가 살아왔던 인생이란
그저 자신들의 고결한 목적 달성을 위해 하나님을 들먹이며 개입을 종용하던 인생이었음을,
하나님을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부리고 이용하고 사용하려 했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받게 된 십자가 형벌이 모든 죄인에게 합당한 보응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를 기억해달라’는 기도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신의 계획에 동원하려던 삶에서 돌이켜,
자신의 죄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죄인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는 십자가 사건 이후 천국의 첫 입성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함께함’은 예수께서 이 죄인이 간절히 원하던 것을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앞서,
사실 예수께서 먼저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며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이 강도가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의 기도와 소망 덕분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돌이켜 주를 찾고 따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성령이 그를 돌이키게 하심입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간구하십니다.
죄인이 돌이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열매 맺음인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언제나 어디서나 ‘낙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다수의 군중에서 밀려난다고 하더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