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결국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이 숨지시기 전 세 시간 동안 예루살렘은 짙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마치 해가 꺼지기라도 한 듯, 가장 밝아야 하는 정오 시간이 밤처럼 어두워진 것입니다.
겨우 5분만 개기일식이 발생해도 사람들이 두려워 떨던 시절, 이 어둠은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숨을 거두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는 다시 밝아졌습니다.
예수의 처형을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의 두려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아진 하늘을 보게 되자 걱정에서 안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가슴 한번 두드리고는 이내 일상을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과 달리 로마군의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진정한 의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들과 백부장은 서로 같은 것을 보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하나님 나라에 절대 들어올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어둠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밝게 열린 은혜의 문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예언된 낮이 밤처럼 변하는 현상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역행하여 은혜를 거두어가시는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시는 동안 해가 어두워진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예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대신해 오롯이 받아내시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반으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서부터 성소의 제사장을 지켜주었던 휘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
런데 바로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반으로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로써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간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지성소와 성소는 하나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자신의 몸을 찢어 화평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을 이룬 사랑과 은혜의 열매입니다.
이 은혜에는 자격과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인종적 주변인였던 이방인 백부장에게도,
거친 인생을 살아와 범죄자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도덕적 실패자인 십자가 한 편의 행악자에게도,
사회적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된 사회적 약자였던 갈릴리의 여성들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는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을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특정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난받는 자, 고통받는 자, 눈물 흘리는 자, 연약한 자, 억울한 자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외당한 약자라는 것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오래 신앙생활 했든 아니든, 부자든 가난하든, 착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적 위치가 높든 낮든,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라고 해서, 성공한 자라고 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조건적인 선택이고 조건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의 사랑과 은혜가 무조건적이라는 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통해 증명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었습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 권력의 중심에 있던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의 대명사였지 결코 소외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그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교절 절기 중에 겹치는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날 중 하나로 여기는 날입니다.
그런 날을 앞두고 시신을 만진다면 그는 율법상 일주일간 부정해지게 됩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또한 성공한 종교 지도자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가장 거룩한 날을 부정하게 보낸 그의 평판은 일주일이 지난다고 해서 정결례를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정결함과 커리어를 훼손하면서까지,
예수의 시신을 닦고 세마포로 감쌌습니다.
요셉은 대체 왜 미래가 없는 일에 왜 자신의 평판과 지위를 걸었을까요?
요셉의 이해할 수 없는 이 행동이 바로 복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를 사랑받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받은 만큼 하는 것이 아닌, 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닌,
댓가나 계산 없는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미래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미래, 형통, 물질, 생존에 있지만,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자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이런 무조건적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미래에 대한 계산 없이 뛰어드는 그리스도인들을,
휘장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을 통해 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