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게 됩니다.
지중해의 깊은 바다, 영혼까지 얼어붙을 듯한 낮은 수온, 산소는 커녕 빛 한 점도 없는 절망적 공간,
소화액이 가득한 극한의 환경에서 요나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전무합니다.
바다 속이든 물고기 뱃속에서든 요나가 살아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정말 믿기 힘든 기적입니다.
이를 믿는 것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학을 뒤엎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요나의 생사 문제를 통하여 더 깊은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요나의 기적을 ‘위기에서 살아남은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사흘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자신도 사흘 밤낮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요나에게 일어난 기적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로서 완전히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부활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는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 무덤, 곧 사망 권세의 예표였습니다.
우리에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있었던 것을 믿을 때 만큼 커다란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다 속에서 요나는 죽었습니다.
완전히, 철저히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의 기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비밀이 드러납니다.
정황상,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결국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에게 먹혀버린 요나가 해야 하는 기도는 무엇이어야 했을까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탄식, 회개와 용서를 애원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던져져 회개해야 마땅한 요나는 놀랍게도 오히려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운율은 애가의 슬픈 운율이지만 내용은 정반대로 시편의 감사시들만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대체 이 모순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해결은 이 기도의 진정한 주인공이 요나라기보다는 예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요나의 죽음은 먼 훗날 예수께서 감당하실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죽음은 그저 예표로서의 역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훗날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마음까지도 미리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며 느끼셨을 그 감정을,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먼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던져진 순간에서까지 그토록 감사할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 비밀은 요나서 2장 8절 말씀에서 풀어집니다.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나이다.”
여기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란 사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장에서 은혜라고 번역된 ‘헤세드’는 문법상 우상들이 준 거짓 은혜를 가리킵니다.
즉 이방인들이 헛된 우상을 향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
바로 그것이 감사의 이유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방인 선원들은 요나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구원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예수님 한 분의 죽음이 온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예표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의 원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방인들이 스스로 헛된 우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단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폭풍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마음은 평생 하나님을 찾지도 돌이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그들의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헛된 것을 향한 사랑을 바다에 다 던져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자들로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빚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와 돌이킴과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여 도망친 요나를 죽음에 던지셨다가 이내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방법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된 성향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려내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 주실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훈육을 거부합니다.
체벌도, 꾸중도, 지적도 모두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회초리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교정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바로잡히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때로 아픈 법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때론 엄한 훈육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채찍질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한 자녀로 빚어가시기 위함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는 방임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적극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고집을, 교만을, 허영심을 십자가의 죽음에 닿게 하시어
헛된 것에서 진정한 은혜로 돌이키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