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를 괴롭히기를 좋아합니다.
모순적이게도 행복한 순간보다도
행복이 망가지는 순간의 텐션에서 사람의 오감은 여러모로 더 자극을 받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이 해소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다시 생각나게 되는 자극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나면 곧 중독이 됩니다.
희한 하지만… 행복이나 사랑이나 기쁨에 중독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람은 행복이나 사랑이나 기쁨이 아니라 쾌락이나 범죄나 우울함에 중독됩니다.
아이러니지만 사람은 행복이 유지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낍니다.
어쩌면 행복이 유지될까 봐 불안함을 느낀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타르시스를 다시 맛보기 위해선 순서상 먼저 위기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위기가 있어야 해소가 있습니다.
모든 영화가 그렇지요. 기.승.전.결.
위기가 없다면 어떤 이야기도 진행이 안됩니다.
사람은 종종 영화 같은 인생을 꿈꿉니다.
사람은 내면에서 은밀히, 위기가 생기길 원합니다.
사람은 위기가 올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두려움에 맞설 순간을 상상하며 희열을 느낍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불륜의 끝이 행복일 것이라 기대하며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죠. 위태로운 일이기 때문에.
미련한 사람은 처음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그 설레임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서 안정적인 행복과 사랑을 버리고,
그 사랑과 행복이 무너져 내릴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결정합니다.
행복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긴장감과, 그 모든 일이 휘몰아쳐 지나가는 순간 카타르시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 끝이 파국인 걸 알지 못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이 그런 파국인 것을 알기에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불나방 같고 미련해 보이겠지만,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쾌락을 행복보다 더 좋아합니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이율배반적인 이면을, 악한 본성 혹은 타락한 죄 된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모든 타락한 인간에게 있는 자연스러운 본성 곧 자연의지입니다.
본성 상 인간은 죄악으로 가기에 빠릅니다.
그렇기에 만약, 누군가 사람이 진정으로 그 본성을 거스르는 선한 일을 열망하고 계획하고 도모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요,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일인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채우시기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계시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은혜와 사랑이 담긴 말씀을 가득 먹고 마셔 배가 부르도록
성령은 우리를 성경의 말씀 앞으로 부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6-17)
오직 성경 만이 악한 본성의 자연의지를 벗어나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성자의 통치로 돌아오게 합니다.
죄인의 악한 본성인 자연의지를 떠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선한 일의 시작을 중생의지라고 부릅니다.
중생의지는 우리를 돌이켜 주님이 다스리는 은혜의 나라 천국에 돌아오게 합니다.
중독의 싸이클을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말씀 앞으로 중생의지를 이끌어가시는 성령 뿐입니다.
성령 하나님만이 죄악된 본성을 벗어나 천국을 소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