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포악했던 도시였습니다.
둘레만 90킬로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거주지역에 6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운집해 있었으니,
그야말로 고대 근동의 거대한 심장부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의 크기만큼이나 그 죄악도 거대했습니다.
그 악독함이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상달될 정도로 죄악이 관영한 곳,
그곳이 바로 니느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절망적인 도시에 한 명의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요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스올의 죽음을 겪었던 요나는
육지에 뱉어져 다시 살아난 후 첫번째와 동일한 명령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요나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순종은 여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못해 행하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불완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사흘을 걸어야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니느웨였지만, 요나는 단 하루만 걸으며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 짧은 한 마디에는 회개하라는 권면도, 돌이키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냉정한 시한부 종말 선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40일이라는 유예기간 자체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자비와 은혜였음을 직감한 요나는,
최대한의 저항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40일의 은혜 중 단 하루만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흘 길 중에 하루 길을 외쳤다는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40일 중에 하루만 외쳤다는 시간적 개념입니다.
요나의 순종은 1/3의 순종이 아니라 1/40의 순종,
그야말로 최소한의 형식적 순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나가 하루 동안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60만 명의 거대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전할 수 있는 메시지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 하루의 외침만으로 이 거대한 도시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욘3:5)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믿었다’는 동사는 매우 특별한 형태로 쓰였습니다.
3인칭 복수 사역형으로,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독려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일으키고,
그 믿음이 또 다른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연쇄반응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회개의 물결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여 왕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왕은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으며 재에 앉았습니다.
이 변혁은 권력의 중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가 온 도시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이런 극적인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요나의 뛰어난 설득력 때문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이 원래부터 종교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악독이 상달될 정도로 극심한 죄악 가운데 빠져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설득이나 논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영적으로 죽어야 할 자들의 영혼을 단숨에 살려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 자체가 인간의 완고하고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니느웨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회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였고,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사역에서 찾아오는 실망과 낙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순종하여 전하는 것까지이고,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우리에게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마음이 아기처럼 부드러워진 사람은 죄에 대해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면 나의 죄에 민감해지고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해집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에게 실망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나의 죄성에 대해 애통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반면 마음이 굳은 죄인들은 굳은살이 박힌 것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그 대신 다른 이의 죄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성령께서 주신 부드러운 마음에서 발원한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그들은 요나가 회개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마음속에서 일하시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죄에 대해 예민해져 스스로 죄를 깨닫고
‘악한 길과 포악에서 떠나는’ 구체적이고 행동적인 회개를 보였습니다.

요나서를 통하여 우리는 깊은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제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어 죄에서 돌이키게 하실 주님은
불완전하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도 완전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요나처럼 소극적이고 부족한 우리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이 시대의 니느웨들을 구원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