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4장에서 우리는 한 선지자의 격렬한 분노와 마주하게 됩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보며
“매우 싫어하고 성내어”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품어온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얼마나 깊은 분노였는지, 히브리어 성경은 그의 마음을 ‘불타오른다’고 표현합니다.
요나의 분노는 표면적으로는 정당해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출34)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직접 선언하신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나는 매우 유명한 뒷부분 내용을 의도적으로 생략합니다.
원래 출34장에는 “용서하더라도 형벌은 결단코 면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를 의도적으로 바꾸어 “하나님은 뜻을 바꾸는 분”이라고 성내어 말합니다.
이는 요나가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정의와 공의는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말씀하신 율법을 스스로 어기시는 것 아닙니까?”
이는 우리가 불의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권선징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의심하며 분노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요나를 가르치십니다.
박넝쿨을 예비하여 그늘을 만들어주시고는, 하루 만에 벌레를 보내어 그 박넝쿨을 시들게 하십니다.
거기에 뜨거운 동풍까지 더해져 극도의 괴로움을 당하게 되자,
요나는 또다시 분노를 폭발시키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고 기르지도 않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아기들을 특별히 언급하신 것은
이 말씀의 핵심이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시는 이유가 단순한 인구 수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독이시며 박넝쿨과 니느웨를 대비시키시는 깊은 의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세 가지 부분에서 요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첫째는, 요나가 권선징악을 바라며 니느웨의 ‘큰 악’을 정죄하고 심판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쳤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심입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아기들이 니느웨의 큰 악에 대체 얼마나 기여하였기에 죽여달라고 분노하는 것인지,
요나의 적극적인 불순종과 소극적인 불순종에 비한다면 이 아기들의 죄악은 너무나 미약하고 가벼운 것 아닌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요나의 요구대로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요나부터가 그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어린 아기들을 통하여, 우리 역시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요나를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선하고 의롭고 순종의 공로가 충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에게 베풀어진 사랑과 은혜는 누구의 공로일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을 용서하시더라도 반드시 그 죄값을 지불하게’ 하시는 자신의 공의와 정의의 심판을 자신의 아들에게 쏟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가 행하시고 당하신 하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니느웨가 소중한 이유는 하나님이 지불하신 댓가, 치르신 희생, 행하신 공로 때문인 것입니다.
요나는 박넝쿨에 그 어떤 공로를 행함도 없이 박넝쿨을 아꼈지만,
하나님은 니느웨를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세 번째, 그렇기에 니느웨의 가치는 하나님이 행하신 공로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사람들이 소중한 이유는 그에게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옆 사람도 구하셨다면,
우리는 그들을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요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님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역시 그 은혜로 다른 죄인들을 품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요나 앞에 배를 준비하시고, 폭풍을 준비하시고,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벌레를 준비하시고,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분노하는 우리에게, 분노 대신 주의 사랑을 일으키시려고
우리 삶에 은혜의 바람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