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돌아간다는 뜻의 히브리어‘슈브’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단어는 남편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이쉬’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 두 단어를 보았을 때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결정을 한 것은 정말 비현실적인 바보스러운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의 결정은 재혼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남편을 잃은 이방 여자가 남편을 얻을 수 없는 땅으로 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생계를 포기하고 삶을 포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방법이 없습니다. 땅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재혼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자녀 없이 과부가 된 여성들의 생계를 위한 조치로 계대결혼을 명하셨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신명기 25:5 – 6)

그러나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내어줄 다른 아들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이방 여인과 재혼 할 자가 없습니다.
남성이라도 이방인이 이스라엘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울텐데, 룻은 이방인 여성으로서 이스라엘 땅을 선택한 것입니다.
남편 없는 삶의 선택과 실행이란 진취적이거나 도전적인 능동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같은 결정입니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유의미하다고 볼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룻의 결정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없는, 자녀가 없는 이방 여인은 이제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산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백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지,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에 (적어도 모압사람에게는 더욱..)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간다는 것이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의미를 지닌 행동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매우 불합리하여 이해 할 수 없는 룻의 헌신과 희생과 무모할 만큼 전적인 사랑의 선택은 사실 사람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전적인 사랑의 마음과 행동은 오직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 밖에 행하실 수 없는 것이죠.
룻이 이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룻에게 예수의 사랑을 부어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룻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룻의 전적인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룻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이제 이런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사랑이 아닌, 유익이 있어서 하는 사랑이 아닌, 이해되지 않는 전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룻을 통해 나오미에게 사랑을 베푸셨듯,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