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도망자였습니다.
동족을 구하려던 그의 선한 의도는 살인이라는 극단적 사고로 이어졌고,
그가 형제라고 여겼던 히브리인들은 그런 모세를 고마워하거나 감싸주기는커녕 적대감을 드러내며 그의 도움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의 추격을 피해 600킬로미터나 떨어진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 어느 우물가 근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왕자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에게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화려한 왕자의 삶을 잃게 된 상실감이 아니라
그가 구하려던 동족들의 배신으로 인한 상실감이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날카롭게 소리친 히브리인의 차가운 말은 모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애굽에 대항하여 저항할 힘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광야를 지나 미디안 광야까지 걸어오는 데에 족히 40여 일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동안 광야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와 차가운 밤기운 아래에서 모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다시는 남을 돕지 않으리라.
다시는 약자들을 위해 나서지 않으리라.
다시는 도움받을 자격 없는 이들을 위해 싸우지 않으리라.
다시는 사랑받을 자격 없는 이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아무나 형제로 여기며 마음문을 열지 않으리라”
원래 사람은 상처받으면 곱게 말하지 못하고 곱게 행동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선을 행하고 낙심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배려와 선의가 부정당하는 듯 느낄 때면 거절감에 상처를 입고 배신감에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상처를 입은 경험이 많아질수록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행을 베풀기 어려워집니다.
또다시 배신당할까 봐, 또다시 상처 입을까 봐 잔뜩 경계하며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인색해집니다.

그런데 미디안 우물가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머물던 그 우물가에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 찾아왔을 때,
힘센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밀어내고 물을 빼앗는 것을 모세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밀려나는, 모세의 눈에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모세가 일어났습니다. 상처받고 실망했던 그가,
다시는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그가,
약자를 위해 다시 일어선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고,
상처의 기억이 발걸음을 무겁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기어코 일어났습니다.
한 번 넘어진 자가 다시 일어서는 것,
한 번 상처받은 자가 다시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모세의 일어남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선한 의도와 사랑으로 한 일에 대해 오해받거나 배신당할 때의 그 아픔이 아직도 가슴속에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일어났습니다.
한 번도 상처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의를 사랑하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아픔을 뛰어넘어 현재의 필요에 응답했습니다.
모세가 일어났다면 우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모두 모세를 모범으로 하여 닮아가자’는 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자는 간청입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사건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숱한 범죄와 실망스러운 행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모세가 일어나 도운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어나십니다.
출2:24절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보시고 아시고 행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있습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상처를 딛고 일어났다면, 우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닮아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모세는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았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을 상급으로 바라보았기에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게르솜’, 즉 ‘나그네’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디안에서의 체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적 고백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록 미디안 땅에 정착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땅을 향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상급으로 받을 때까지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나그네는 고향 땅에 돌아가기까지 안식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보상은 목적지에 다다를 때에 얻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향 땅에 이르기 전까진 실망할 수 없습니다.
낙심할 수 없습니다.
상처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나그네의 삶 말입니다.
세상에 정착하되 세상에 안주하지 않는,
현실을 살되 영원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구원자 모세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며,
상처를 뛰어넘어 다시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상처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본향 되시기에,
모세가 일어났듯 우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