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당도했을 때 룻은 이삭을 줍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추수를 하고 난 후 남겨진 부스러기를 줍기 위해서라면 앉아서 기다릴수도 있었겠지만 다급하고 절박한 룻은 오전 내내 서서 기다립니다.
보아스는 그런 룻을 주목하여보고 가까이 부릅니다.
보아스는 아직 추수를 하고 있는 중인 밭에서 룻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허락해 줄 뿐 아니라,
룻 몰래 이삭을 더 흘려주라고 일하는 소녀들에게 말해주기까지 합니다.
점심 식사 시간에도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을 룻에게 점심을 대접합니다.
그냥 준비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직접 서빙합니다.
볶은 곡식은 그날 추수한 곡식들을 구운 그날의 따끈따끈한 양식이었습니다.
마치 만나와 같이 그날의 양식이 은혜로 내리는 것만 같습니다.
기대하지도 못했던 호의를 얻은 룻은 깜짝 놀라 보아스에게 엎드려 감사를 표합니다.

그런 룻에게 보아스는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로,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오게 된 룻을 하나님이 보호하시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맛보여 주고 싶은 것이 보아스의 마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고초를 겪었던 것이 하나님의 회초리가 아니라 보호였음을 보아스는 자신의 호의를 통해서 룻에게 알려주고 위로해주려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격려하는 그 위로의 말속에서 구약의 많은 사건들이 연상됩니다.
보아스는 마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땅을 향해, 갈 바를 알지도 못하는 채 떠나온 것에 룻의 여정을 유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기 위해 피하여 왔다고 말하며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하여 주셨던 것에 룻의 삶을 유비하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말대로, 그리고 그의 위로와 격려대로,
비록 룻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모압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하나님은 원수의 나라 모압의 여인 룻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로 이끌어오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내실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은 먼저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이었듯, 하나님은 룻을 찾아와 하나님께로 이끌어내고 있으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개란 내가 선택해서 내가 찾아 나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오시는 곳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애굽기 19:4)

여호와의 날개로 안아주셨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애굽을 나왔지만, 광야를 생략하지 않았듯,
룻의 인생사는 굴곡이 많은 광야길이였으나,
하나님은 그 과정 속에서도 선하신 계획을 가지고 룻을 보호하시며 함께 해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삶에도 많은 고난이 있고 고초가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심이 아니요, 주의 회초리가 아니요, 그분의 무관심이 아닌
함께하심과 보호하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겪지 않게 하시는 것에 보호와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인생사 속에서 함께하심이 보호이며 은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