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바로에게 “사흘 길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겠다”고 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냐”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치실까 두렵다”고 하자
바로는 발끈하며 태도를 바꿨습니다.
‘살해’라는 뜻의 ‘제사’라는 단어의 강한 뉘앙스가 그를 자극했던 것입니다.
전염병과 칼을 만나게 될까봐 두렵다는 모세의 말은 바로에게 ‘살해’ 협박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바로는 모세의 말을 거짓말로 치부하며,
히브리 종들이 이런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노동을 강화하라고 지시합니다.
벽돌 제작에 필수인 지푸라기 제공을 중단하고, 재료 수급까지 직접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면 제사드리자는 모세의 말 따위는 사치로 여겨질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말은 바로의 바램처럼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예언이었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훗날 정말로 전염병의 재앙을 내리셨고,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셨으며,
사흘 길 홍해에서 애굽군대를 살해하시는 진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여기게 만들려는 바로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던 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될까 두렵다’는 하와의 말에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인 것처럼 여기도록 술수를 부렸습니다.
바로도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전염병과 칼을 만나게 될까 두렵다’는 모세의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말로 여겨질 수 있도록 온갖 술수를 동원합니다.
바로는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다”고 말하며 교묘한 가스라이팅을 시도합니다.
이스라엘의 번영이 애굽 덕분이라는 식으로 과거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가해자를 은인으로, 피해자를 배은망덕한 자로 조작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아들이 태어나면 살해하기까지 하던 애굽의 과거를 심각하게 왜곡한 것입니다.
더 교묘한 것은 바로가 직접 나서지 않고
애굽 감독들을 압박하고, 감독들은 이스라엘 기록원들을 압박하고, 기록원들은 일반 백성들을 몰아치는
내리 갈굼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억압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내리 갈굼은 이 과정에서 진짜 가해자는 갈등에서 빠져나가고,
피해자들끼리 서로 원망하게 만드는 비열할 정도로 효과적인 통제 방법입니다.
성경이 바로의 이런 비열한 술수를 설명하는 묘사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성경은 짚을 주지 않겠다는 표현을 일곱 차례나 반복하며 지푸라기라는 어휘 자체에 집착합니다.
모세오경 중 창세기에서 짚은 낙타의 먹이로 등장합니다.
동물 조련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먹이 통제입니다.
가축들에겐 먹이를 주는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바로는 마치 가축을 길들이듯 지푸라기로 이스라엘을 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결과는 완벽했습니다. 백성들은 정작 바로를 원망하지 않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우리를 바로에게 미움받게 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뱀이 하와를 속였던 창세기 3장처럼
사단의 세력에게 길들여지고 무력하게 당하는 일이 이렇게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절망의 반복이 아니라 극복임을 선언하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프레임 씌워 인간을 에덴에서 쫓겨나게 했지만,
출애굽기 5장에서는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만들려 할 때
오히려 하나님이 이를 비틀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쫓아내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게으르다”며 질책하고 고삐를 바짝 죄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얽매인 자들을 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길의 숙소에서 모세가 죽어갈 때, 하나님은 그를 놓아주셨습니다.
게으르다는 뜻과 동일한 단어로 하나님은 모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놓아주시고 풀어주시고 해방시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안식입니다.
노역의 땅에서 안식의 땅으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 푸른 풀밭, 목초지로 양들을 이끌어 꼴을 먹여주시는 안전함입니다.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으로 배불리 먹을 때,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가축처럼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지푸라기 따위에 목매지 않게 됩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이 안식을 누릴 때, 우리는 죄악의 답습이 아닌 극복을 경험합니다.
사단의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습니다.
“이전이 더 나았다”는 과거 미화나 “현실을 보라”는 압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내리갈굼에 참여하지 않는 용기를 얻습니다.
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아래로 전가하지 않고, 서로 원망하게 만드는 분열에 동참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던져주는 지푸라기 몇 개에 휘둘려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사람은 오히려 해방하는 자가 됩니다.
서로를 풀어주고, 놓아주며, 안식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채우시는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예배자입니다.
바로가 제공하는 지푸라기에 길들여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반복되는 죄의 사슬을 끊고
우리를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