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다시 바로 앞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증명을 요구하며 이적을 보이라고 도발할 것임을 미리 일러주시며,
그 도전에 어떻게 응전해야 할지도 알려주셨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면 뱀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명령대로 지팡이를 던지자 말씀대로 지팡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생물을 생명체로 변화시킨 놀라운 이적에도 바로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술사들을 동원해 이적을 흉내냅니다.
하지만 요술사들의 지팡이들은 곧 아론의 지팡이에게 삼켜져 버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뱀이 뱀을 삼켰다”가 아니라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켰다”고 기록합니다.
지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테’는 정체성을 함의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유다가 다말에게 담보로 준 것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습니다.
이 물건들은 유다라는 사람 자체를 증명하는 고유한 시그니처라고 할수 있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니까 지팡이는 단순한 막대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권위였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7장의 사건은 단순한 뱀들의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통치권과 파라오의 통치권이 맞붙은 우주적 대결의 대리전이었습니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의 지팡이도 뱀이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제압해야 할 대상은 뱀 자체였습니다.
히브리어로도 뱀이라는 뜻의 ‘나하쉬’라는 일반적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탄닌’이라는 전혀 다른 단어가 사용됩니다.
탄닌은 창세기 1장의 큰 바다 짐승, 시편의 혼돈의 괴물, 에스겔서에선 파라오 자신을 가리키는 포괄적 용어입니다.
위협적이고 사나운 짐승이요 혼돈의 상징입니다.
이집트 신화에도 이런 탄닌에 해당하는 뱀들이 등장합니다.
이집트 신화 속에서 태양신 ‘라’는 매일 밤 지하세계를 통과하며 혼돈의 뱀 아페프와 싸웁니다.
방어를 돕는 메헨과 공격을 돕는 우라에우스라는 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한 태양신 ‘라’가 매일 낮을 가져 온다는 것이 애굽인들이 믿는 우주 질서 ‘마아트’입니다.
파라오는 자신을 라의 아들로 여겼고,
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 앞에 탄님을 던진다는 것은
“당신이 정말 라의 아들이라면 이 혼돈의 괴물을 제압해 보라”는 직접적 도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증명의 주체가 역전됩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이적을 보이라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파라오 자신이 신적 존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검증받고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검증에서 파라오는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이집트 마술사들이 요술로 만든 뱀들은 모두 삼켜졌습니다.
성경이 ‘요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중요합니다.
요술이란 비밀스런 기술로서 마술에 불과했지만,
당시 이집트가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요술’ 그 자체는 그들의 정체성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술을 대결의 상대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아론의 지팡이가 바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삼켜버렸을 때,
온 이집트 앞에서 바로의 권위는 땅바닥에 실추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오히려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하여 모세와 아론의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바로의 모습은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입니다.
진실이 거짓을 삼켜버렸습니다.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켰다’는 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 단어는 단 두 번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7장 12절 외에 다른 한구절은 홍해를 건넌 후 찬양하는 15장 12절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뒤쫓던 애굽 병사들이 홍해에 삼켜지는 순간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노랫말입니다.
하나님은 탄닌으로 탄닌을 삼키시고, 혼돈의 바다로 이집트 군대를 삼키십니다.
이것은 ‘이이제이’의 전략이며, 사망으로 사망을 죽이는 역설적 승리입니다.
이 역설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맞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파라오처럼 이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답하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켜졌다가 사흘 후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죽음에 삼켜지셨다가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저주가 저주를 깨뜨리고 사망이 사망을 삼키는 궁극적 승리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십자가 앞에 서게되면 가짜는 파괴되고 진짜만 남게 됩니다.
세상은 돈이 질서의 원리라고, 힘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자부하며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면 증명해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증명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세상의 원리와 기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십자가 복음을 세상 앞에 던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통치받고 무엇을 의지하고 있든지,
우리를 억압하는 주인의 자리를 차지한 모든 것들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검증될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이 거짓으로 점령한 모든 것을 삼키고
유사 진리로 작동하는 거짓 질서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풀무불에 삼켜진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삼켜지는 죽음같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진정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지 증명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