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믿는 세계가 흔들릴 때, 그것을 직면하기보다 외면합니다.
“그럴 리 없어.”
“설명할 수 있잖아.”
그렇게 자기 논리를 지켜내려 합니다.
성경 속 파라오도 그랬습니다.
그는 나일강의 신화를 지키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습니다.
나일강은 생명을 주는 신 오시리스의 핏줄이라 믿었고, 자신은 태양신 라의 아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이 피로 변하자, 나일강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닌 죽음의 피로, 향기가 아닌 악취로 바뀌었습니다.
신화가 거짓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나일강의 신화가 무너진 날, 사람들은 물을 찾아 땅을 팠습니다.
원래 이집트인들은 땅을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피 신이 나일 강을 범람시켜 비옥한 흙을 가져다주는 덕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피가 뒤 갈아엎어준 바로 그 땅을, 물을 찾기 위해 자기 손으로 다시 파헤치고 있습니다.
땅을 파지 않아도 되던 이들이 피가 물이 되자 살기 위해 땅을 파헤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땅을 파도 생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한 일주일 동안 반드시 안식일이 포함되었을 테지만,
마실 물이 없어 땅을 파헤치느라 애굽 땅의 그 누구도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생명이 위협받고 안식이 사라지는 위급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파라오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요술사들이 물을 피로 만드는 속임수를 보고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물이 피가 된 사건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의문이 풀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애써 외면합니다.
필사적으로 모른 척합니다.
이 재앙을 직시하고 그것의 의미를 인정하면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님을, 자신이 믿던 생명이 죽음으로 드러났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고서는 통치자의 자리를 지켜낼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외면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방어기제입니다.
그는 외면의 방법으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 합니다.
이것은 비단 파라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에는 객관의 영역이 없습니다.
진리를 믿든, 진리가 아닌 것을 믿든, 이 두 부류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논리로, 과학으로, 혹은 신앙으로조차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0은 아니잖아요.”
현대의 과학 신봉주의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한 미세한 틈, 아주 작은 확률 하나만 있어도 사람들은 그곳에 모든 신념을 걸어버립니다.
진리를 거부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억지스러운 논리라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그런 억지 속에서도 스스로 드러납니다.
진리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질문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마주할수록 더 깊은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이 사람을 살립니다.
성경은 그 ‘살리는 진리’를 피로 보여줍니다.
나일강이 피로 변했을 때, 실체화된 오시리스의 피는 닿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을 가져올 뿐이었지만,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닿는 곳마다 죽음을 넘어가게 했습니다.
이 피가 닿는 곳마다 생명이 보존되고 구원이 일어납니다.
이 피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흐를 때, 세상은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들고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포도주는 노아 이래로 안식의 상징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포도주를 마실 수 없었지만,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포도주는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 신 포도주를 드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아버지 나라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도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물을 피로 바꾼 것과 정반대입니다.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완성되고,
새로운 약속의 땅, 천국이 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표적이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많은 거짓 안식을 제공합니다.
돈, 권력, 쾌락, 종교, 철학…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안식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시리스의 피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생명과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파고, 지식을 파고, 합리성을 파지만 그곳에는 참된 생명이 없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생명을 길어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피로 생명을 길어 올리셨습니다.
우리가 헛된 우물가를 떠나 십자가로 나아갈 때, 비로소 참된 물을 마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강물을 피로 만드신 것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짜 생명, 거짓된 신화, 인간이 스스로 만든 구원의 체계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폭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피는 장차 십자가에서 흘리실 참된 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나일강의 피로 물든 이레는 안식 없는 세상의 그림자이지만,
십자가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삶의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하는 시작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 피를 마신 자만이, 부패한 피로 물든 세상 속에서도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삶에 사람을 살리는 이 피를 흘려보내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