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천천히 기울어 가던 그날을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비극의 순간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는 방송의 지시에 순종했던 아이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어른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착한 일이라 배워온 아이들에게 방송의 지시는 생명을 앗아간 명령이 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명령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세상과의 타협 문제와도 닮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 중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 재앙과도 닮아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반대편에서 바로는 “이 땅에 머물라, 멀리 가지 말라”고 협상을 제안합니다.
표면적으로 바로의 제안은 합리적입니다.
“제사는 드려도 좋다. 광야로 가는 것도 허락한다. 다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충분히 양보한 것 아닐까요?
하지만 모세는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거절의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통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구별’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는 단순한 종교행위가 아닌 구별의 선언이었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신들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이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구별의 선언입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이 땅에 머물라”는 바로의 협상에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경고대로 애굽에는 파리 떼가 출몰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 번역에선 파리 떼이지만, 히브리어는 여러 종류의 곤충이 섞인 벌레 떼를 말합니다.
애굽에 벌레가 들끊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센땅에는 벌레가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센 땅을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센땅을 구별하실 것임을 바로에게 미리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구별은 그저 삶의 불편함 정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별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구별이었습니다.
네 번째 재앙에 이어, 다섯 번째 재앙도 여섯 번째 재앙에서도 하나님은 고센땅을 구별하십니다.
애굽 땅의 모든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고센 땅의 가축은 살았습니다.
고센 땅에 있으면, 그것이 누구의 소유든, 어느 민족의 것이든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반대로 애굽 땅에 있으면, 그것이 이스라엘의 가축이라 해도 죽었을 것입니다.
고센 땅에는 실제로 파라오의 가축도 많았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따르면, 대흉년 때 애굽의 모든 가축과 땅이 파라오의 소유가 되었고, 이스라엘이 예외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가축이 누구의 것이냐가 아니라, 가축이 어디에 있느냐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별적 차별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으로 구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센땅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구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별의 궁극적 실체는 무엇일까요? 고센 땅일까요?
그곳을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시려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주하게 하시려고 고센땅을 구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궁극적인 구별의 실체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구별하신 결국이라면 왜 다른 본향을 사모하고 기다렸겠습니까?
그렇기에 고센땅은 주저앉아 정착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일어나 출발을 준비하는 이들의 자리였습니다.
이 구별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나야만 새 하늘과 새 땅에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그가 이스라엘이든 애굽인이든 누구든 함께 애굽을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의 “잡족”(에레브 라브)은 파리떼를 뜻하는 ‘아로브’와 같은 어근입니다.
이들은 모두 섞여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어린양의 피로 구별된 사람들은 혈통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의 혈통이나 자격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곳에는 차별이 없고, 오직 은혜로 세워진 구별만이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바로의 협상안을 내밉니다.
“교회는 다녀도 좋아. 하지만 헌금은 부담스럽지 않게 하자.”
“주일에는 예배드려도 좋아. 하지만 평일에는 가족만 생각하자.”
“기쁨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어? 부담 없이 하고 싶은 것만 하자.”
표면적으로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침몰하는 배에 계속 머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미 멸망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그 명령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불타는 건물에서, 기울어가는 배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십자가로 뛰어내려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 서 있는 이유는 우리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영역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예정하심에 대한 감사이며 이것이 우리의 용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여전히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뛰어내리십시오!”
세월호 같은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구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시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는 멸망하는 애굽에서,
침몰하는 배에서,
심판 받을 세상에서,
십자가 위에 예비된 생명으로 뛰어내리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