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세상의 모든 정보가 쏟아지고,
24시간 켜진 불빛 아래서 우리는 잠들지 않는 도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모든 것이 환해졌는데, 왜 우리의 미래는 더욱 캄캄하게만 느껴질까요?
왜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만 갈까요?
인류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의 캄캄함은 출애굽 과정에서 일어난 재앙들을 통해서 잘 표현되고 묘사됩니다.
특히 우박과 메뚜기로 이어지는 재앙들이 의식주를 파괴하는 모습을 통해 묘사된 공포와 불안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병리적 심리를 잘 보여줍니다.
모세로부터 메뚜기 재앙을 경고받았을 때,
바로의 참모진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고 있을수록 파국적인 손해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함정”이라고 불렀습니다.
함정이란, 결국 미끼를 얻으려 욕심을 내다가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합리적인 생존의 길은 명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온전히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을 붙잡는 것이 스스로 놓은 덫에 걸리는 일임을 명확하게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반복합니다.
이는 마치 도박에 빠진 사람이 잃은 것을 만회하려다 결국 모든 것을 탕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사람은 위기에 몰리고 절망에 빠지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저지르곤 합니다.
마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비합리적 결정의 결과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 결정의 주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부서졌는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사람의 악한 본성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과는 언제나 거리가 멉니다.
선하고 의로운 건강한 마음 상태여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도 가능합 법입니다.

결국 모세의 경고대로 메뚜기가 온 애굽땅을 덮었습니다.
메뚜기들은 마치 눈꺼풀이 눈을 덮듯 애굽땅을 뒤덮었고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앞날이 캄캄해진 바로가 뒤늦게 잘못했노라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바로의 절박함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자기 파괴적인 결정을 반복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앞날이 캄캄해진 그들의 심리를 그대로 재현하듯
메뚜기가 지나간 자리엔 손에 잡힐듯한 흑암이 애굽땅을 뒤덮었습니다.
칠십 인 역 성경이 “만져지는 흑암”이라고 번역했듯,
실체를 갖춘 질감 있는 흑암이었습니다.
이는 밤 동안의 어두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흑암입니다.
불을 켜려 해도 어둠을 몰아낼 수 없는 흑암입니다.
이 흑암 속에선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시각적 정보가 차단되어 그 누구의 얼굴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조차 쳐다볼 수 없는 흑암이 사흘간 지속되었습니다.
사흘간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고센땅에 변함없이 내리고 있는 빛줄기뿐이었습니다.
고센땅을 구별하신다는 표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유일한 시각 정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를 비롯한 대다수의 애굽인들은  침소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갔다가 부딪힐까 봐, 다칠까 봐, 넘어질까 봐, 쓰러질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평소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공간에서만 머물며
침상에 두 발 뻗고 누워있는 익숙한 행동으로 당황한 마음을 달래 보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유일한 빛을 보면서도 침소에 누워만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면 빛 아래로 가야만 합니다.
다시 보기를 원한다면 넘어지더라도, 쓰러지더라도, 주저앉았다면 기어서라도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하는 법입니다.
그 길 만이 다시 ‘보기 위한’ 유일한 실마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빛이 분명히 눈앞에 보이는데도, 익숙한 어둠을 길로 여기고 안주하려는 모습,
그것이 죄의 본성이고, 인간의 교만입니다.
죄인들은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면서도,
그 빛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수반되는 낮아짐과 불편함을 두려워하여,
익숙한 자기 파괴적인 어둠 속에 머물기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흑암의 때에도 빛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어서라도, 부딪히면서라도, 손을 더듬으며 표징을 향해 움직인 자들.
성경은 그들을 “수많은 잡족”(출 12:38)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결국 이스라엘과 함께 유월절의 은혜에 참여하고 출애굽 공동체에 합류하게 됩니다.
즉 보이지 않게 된 흑암의 재앙이, 누군가에게는 초대장이 된 것입니다.
유일하게 보이는 저 빛을 향해 모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출애굽 시킬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 흑암 속에 내리는 빛줄기 속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어감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오직 그분의 얼굴빛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이 헛헛하고 불안하며, 앞날이 캄캄한 흑암 속에 갇힌 듯 느껴진다면,
바로 이때가 우리의 마음의 눈꺼풀을 걷어주셔서 유일하게 보이는 빛,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우리가 겸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 아래 거할 때,
마음의 질병과 절망, 자기 파괴적인 통제 욕구에서 벗어나 참된 구원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오늘도 앞날이 보이지 않아 헤매는 인생의 캄캄함 속에서
우리를 빛으로 부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