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2장의 밤은 긴박했습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쫓겨나듯 떠났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이주한 지 430년 만에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면서 발효되지 못한 반죽을 그릇에 담아 어깨에 메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이 다급해서 미처 빵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예상치 못한 출애굽으로 인한 ’ 시간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반죽을 옷에 싸서 나왔습니다.
공기 중의 효모로 자연 발효되는 것조차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음식 규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라”(출 12:19)고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된 사람이라도,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언약 공동체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협박이 아닙니다.
이는 언약 공동체에서의 단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룩을 먹는 자는 애초에 이 언약 공동체에 속한 적이 없는 자”라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누룩을 남겨놓은 사람은 처음부터 유월절 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누룩을 불태우고 유월절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후 한 달간은 누룩을 넣고 싶어도 넣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끊어진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라트’가 본문에서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은혜가 취소되고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절단(카라트)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누룩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엄중하게 말씀하실까요?
누룩은 반죽을 부풀려 빵을 부드럽게 합니다.
일상에 매우 필요한 것이기에 누룩 자체를 부정 한하고 나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율법은 무교절 때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일상에서도 누룩을 제하라고 명령하셨을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셨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로 양식을 폭발적으로 불리는 누룩의 역할을 친히 행하셨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는 그날 하루에 성도의 수가 삼천 명이 더해지는 폴박적인 교회 부흥의 역사가
가루 서말에 누룩을 부어 부풀린 반죽처럼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즉 예수님이 누룩이시고, 성령님이 누룩이셨습니다.
문제는 누룩 자체가 아니라 “어떤 누룩이냐”입니다.

무교절에 금지된 것은 “애굽에서 기원한 누룩”이었습니다.
당시 누룩은 어제의 빵에서 떼어와 오늘의 빵을 발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을 넣는다는 것은 어제의 빵을 계승한 연속성을 오늘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만약 애굽에서 나온 공동체가 계속 유교병을 먹는다면, 여전히 애굽의 빵을 먹고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과의 완전한 단절을 원하셨습니다.
애굽의 종교, 문화, 관습, 가치관, 유산처럼 이어져온 관성을 멈추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승이 아닌 단절로써 무교절 기간에 완전한 단절을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에서 누룩의 역할을 자처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순종 가능한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순종하는 만큼 복 받는 비결처럼 변질시켰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이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절단당할 죄인들의 죄 값을 해결하는 유일한 통로이지만,
변질된 교훈은 오히려 자신의 공로를 은혜의 자격으로 삼게 합니다.
유월절 식사에서부터 일주일간 누룩을 제하라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세상의 가치관과 관습,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도 섞지 말라는 뜻입니다.
순전한 무교병이 되기를 거부하고 이전의 가치관을 계승한 부드러운 유교병을 선택하는 자들은
스스로 언약 백성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구원받아 약속의 땅을 향해 부름 받은 우리는 다릅니다.
안식의 땅을 향해 가는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은 매일 하늘에서 내리를 만나를 유교병 대신 먹었습니다.
만나는 저장할 수도, 발효시킬 수도 없는 양식입니다.
광야 생활 전체가 무교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구원이라는 점에서 시작해 성화라는 선을 그려가는 과정으로서의 무교절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애굽에서 가져온 누룩 섞인 빵으로 배를 채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살에 참여하였고,
순전한 말씀의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룩을 제하는 것은 구원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 때문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의 감격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를 죄의 종노릇 하던 애굽에서 건져내어,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하신 그 사랑이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