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속도는 곧 능력이며, 빨리 도달하는 것은 성공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인생이 조금이라도 지체되거나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으면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느낍니다.
스무 살에 대학을 가면 성공이라 생각하지만,
서른아홉에 대학을 가면 너무 늦었다며 인생을 돌아서 간다고 여깁니다.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지름길을 원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3장을 보면,
가장 빠른 길을 두고 일부러 돌아서 가는 광야 길로 이끄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마주합니다.
약 3,500년 전,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블레셋을 통과하는 빠른 해안 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해안 길이 아닌 돌아서 가는 길, 홍해 앞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앞에는 시퍼런 바다가 가로막고, 뒤에는 마음을 바꾼 바로의 최강 전차 군단이 쫓아옵니다.
하루라도 빨리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하나님은 왜 이런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성경은 “전쟁을 보면 마음이 돌이킬까 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피하게 하시려고 돌아가게 하신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 고작 블레셋을 두려워하셨겠습니까?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분이 가나안 족속을 걱정하셨겠습니까?
전쟁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싸움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돌아서 가게 하신 이유는 전쟁 회피나 강군 육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훈련은 ‘강해지는 훈련’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연약해지는 훈련’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라고 말하며 서로를 위로합니다.
하지만 근육을 성장시키는 적당한 스트레스 정도라면 애초에 고난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견딜 만하다면 그것은 운동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은 운동처럼 우리 사정을 봐주며 닥치지 않습니다.
폭풍처럼 몰려옵니다.
견뎌내기 어려운 위기의 순간들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파도처럼 연이어 닥쳐옵니다.
진짜 고난은 근육을 만드는 게 아니라 파열시키고, 부상을 입히고, 장애를 남깁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결코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하게 만듭니다.
다친 다리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인 약점이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돌아서 가게 하시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광야의 혹독함을 통해 우리를 ‘강자’로 키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고백하는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오직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안고 가듯, 하나님께서 안고 가시는 그 이끄심의 체온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은 의롭고 선한 것이 아닌, 언제나 익숙한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죄에 젖은 노예근성은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보다 습관적으로 악한 본성을 따라 세상을 더 의지하게 합니다.
틈만 나면 진리에서 돌이켜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전쟁을 보면 두려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아셨습니다.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과거를 그리워하며 배반할 존재임을 너무도 잘 아셨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예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도록,
‘돌아갈 곳’을 없애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홍해 앞으로 백성들을 이끄셨습니다.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그 자리가, 사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사흘 길 가서 제사할” 바로 그 장소였던 것입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를 위해 제물을 따로 준비해 두셨습니다.
지금 달려오고 있는 애굽 군대가 바로 그 제물이었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옭아매던 옛 주인인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고,
다시는 노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비가역적인 자유’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즉흥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던 430년 전부터 이미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애굽에서 건져 내실 것을 예언하며 자신의 유골을 메고 나갈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대로 이스라엘이 요셉의 유골을 들고 나오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들을 돌보시고 이끄시는 중임을 증명합니다.
돌아서 가는 길로 백성들을 이끄신 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서 가는 듯 보이는 이 길이야말로 처음부터 마지막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치밀하고도 사랑 가득한 섭리의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연약한 인간의 노예근성이 의지할 옛 주인을 죽이시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믿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주인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입니다.
지름길도 아니고, 돌아서 가는 길도 아닙니다.
남은 길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 뿐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안고 광야길을 함께 해주실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