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마당에서 탈곡을 마치고 보아스는 그동안 수고한 일꾼들과 회포를 풀고 곡식단 끝에 누워 잠들었습니다.
한밤중에 룻은 남자들이 가득한 타작마당 사이를 지나 곡식 단 끝에 누운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습니다.
룻은 보아스를 흔들어 깨우지 않고 바람이 보아스를 깨우도록 겉옷을 들어내 보아스의 발이 드러나게 합니다.
밤중에 한기를 느껴 떨며 일어난 보아스는 발치에 누워있는 룻을 발견합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드러난 발을 옷자락으로 덮으려 할 때,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달라’고 합니다.
밤중의 한기에서 자신의 발을 가려 보호하듯이 자신도 그렇게 덮어 보호해달라는 표현은 참 시적입니다.
그렇기에 밤 중에 찾아온, 인생의 풍파 앞에 떨고 있는 룻에게,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는 보아스의 대답은 친절을 넘어 따듯한 희망의 약속이 됩니다.
그것은 룻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처럼 여겨주겠다는 다짐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달라는 부탁에서 사용된 옷자락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나프’입니다.
옷자락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날개로 번역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룻기 2장 12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축복할 때 사용했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상 주시길 바란다’라고 축복했던 그 축복에 등장하는 그 날개가 바로 옷자락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룻은 지금 보아스에게 ‘당신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개로 덮어주실 거라고 했죠? 이제 당신이 그 날개가 되어주세요.’
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과부 둘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에 그렇게 나서주어야 할 ‘기업 무를 자’로서의 자격도 없고,
나서게 된다면 분명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의 기업을 물러주는 일’은 ‘잃어버린 형제의 땅을 돈을 주고 되찾아 오는 일’을 가장 핵심적인 사항으로 포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룻을 덮어줄 옷자락이 되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날개가 되어주려고 합니다.
대체 왜 보아스가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사용당할까 봐 잔뜩 경계심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 경계심이 녹아내리는 때가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은 손익 계산을 멈추게 합니다.
사랑을 빼고서는 보아스의 이런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룻과  보아스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룻기 3장에서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는 분명히 남녀 간의 사이에서 흐르는 긴장감, 즉 설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 날개를 덮어 보호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케 하십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한1서 4:18 – 21)

위에서부터 오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용기 있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