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지도 사흘이 지났습니다.
출애굽 한 지 열흘째가 되도록 그들은 쉼 없이 걸어야만 했습니다.
가지고 나온 반죽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물이 없어 새로운 반죽을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반죽은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지 이미 며칠이나 지났습니다.
체력이 바닥 나자, 그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습니다.
체력이 바닥나면 본성이 나오는 법입니다.
사흘 전 홍해에서 보았던 기적의 감격은 사흘이 아니라 삼 년은 지난 듯 멀게만 느껴지고,
감사의 감격은 증발해 버렸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오아시스는 그들에게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살았다고 기뻐하려던 찰나 그 기쁨은 이내 원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물이 너무 써서 마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에선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마라’를 만나게 됩니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며 춤을 추었을지라도,
당장 타는 목마름과 눈앞에 나타난 마실 수 없는 쓴 물 앞에서는 누구나 무너집니다.
그럴 때 우리 입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희망이 원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위해 방법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가 가리켜주신 나무를 마라의 쓴 물에 던지자 쓴 물은 곧 단물로 치료되었습니다.
쓴 물을 치료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며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면 앞으로 그들에겐 질병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선포하십니다.
마치 순종을 대가로 치료를 약속하시는 듯한 성경의 이 장면을 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종하면 복 받고 질병도 피할 수 있으며, 어떤 병에서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바람을 믿음이라 확신하게 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때로 무례한 자신감이 되기도 합니다.
아픈 이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거나
“죄악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니 회개하면 나을 것“이라는 등의 확신에 찬 말들을 건네면,
이런 말들은 위로가 아닌 언어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믿음의 바람처럼, 치료가 오직 우리의 정성과 순종의 대가로 얻게 되는 것이라면,
이 땅에서 치료받지 못한 채 병마와 싸우다 떠난 수많은 성도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순종하는 만큼 복 받고, 순종하는 만큼 보호를 받고 치료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을 조준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독을 풀어놓은 우물’과 같습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타락한 이후,
인간의 본성은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오염된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것들은 언제나 날 선 원망과 시기, 자책과 박탈감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마라(괴로움)’이기에 인생의 맛이 쓴 것입니다.
이 쓴 물은 설탕을 첨가한다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지 않습니다.
바닷물에 설탕을 붓는다고 식수가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본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평생 쓴 물을 쏟아내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무엇이 우리 본성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절망적인 마라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아니, 가리키셨다기보다 가르치셨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가리키셨다고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야라’는 알려준다는 뜻으로서,
명사형으로 읽었을 때 ‘토라’가 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쓴 물을 치료할 수 있는지 이 나무에 대해 부족함 없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가르쳐 주시며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를 알려주셨던 그때처럼,
쓴 물이 되어버린 이들을 위해 새로운 나무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쓴 물에 나무를 첨가한다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첨가물이 아니라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그 무엇입니다.
나무를 물에 던지기 위해선 도끼질 먼저 해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뿌리째 뽑아 던질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뿌리에 연결된 채로는 물에 던져질 수 없습니다.
물에 던져지기 위해선 생명의 근원에서부터 잘려 나와야 합니다.
도끼질당하고 쪼개져 사망의 물 가운데 던져지는 이 나무 덕분에 쓴 물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 나무는 훗날 우리를 대신해 도끼질당하고 쪼개져 사망의 물 가운데 던져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불순종의 형벌(질병)까지 대신 짊어지신
그리스도라는 나무가우리 인생의 우물 속에 던져지자,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의 수질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육체의 치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치료는 영원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나무를 통해 단물이 된 자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말씀이 부담이 아니라 달콤한 양식이 됩니다.
타인을 향한 날 선 원망 대신,
사랑의 순종을 길어 올리게 됩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쓰디쓴 원망이 아닌 기
쁨과 감사의 단물로 바꿔주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