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산의 자욱한 구름과 번개, 땅을 흔드는 나팔 소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의 강림하심 앞에 그들은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엄중한 침묵을 깨고 들려온 하나님의 첫마디는
뜻밖에도 ‘무엇을 하라’는 서슬 퍼런 명령이나 ‘무엇을 하지 마라’는 금지 조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첫마디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는 하나님의 자기소개였습니다.
율법의 드높은 기준으로서 제시된 십계명의 문은 ‘명령’이 아니라 ‘관계’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아노키 야훼(나는 여호와다).”
이 선언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스스로 존재하시는 전능자의 권위를 담고 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자신을 “엘로헤이카(너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존재의 선언이 아니라 관계의 선언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너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피조물인 인간과 ‘너의 하나님’과 ‘나의 백성’의 관계,
즉 ‘우리’의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과 율법을 먼저 주시고 잘 순종하면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즉,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의 결과로써 드러나는 ‘은혜’였던 것이지요.
은혜가 먼저고, 그다음이 순종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지켜서 구원받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차피 구원하실 이들에게 왜 십계명을 필두로 율법을 수여하신 것일까요?
지켜서 구원받는 것도 아닌데?!
바울의 말대로 율법은 오직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뿐인데?!
주님은 왜 구원하신 이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또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받은 은혜가 취소될지도 모르니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여전히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순종은 진심과 무관한 굴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지킨 만큼 복을 받기 위한 일종의 투자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보상을 전제로 한 순종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이지요.
은혜와 순종의 순서가 뒤바뀌는 순간, 신앙은 메마른 율법주의나 공포 섞인 거래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단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표지일 뿐일까요?
그렇다면 순종은 결국 자격의 과시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것은 결국 허울 좋은 우월감일 뿐이며 특권 의식의 과시로 작용할 뿐입니다.
실제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무례해질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유가 모두 아니라면,
하나님은 대체 왜 십계명을 주신 것일까요?
우리는 연약하여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킬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했던 완벽한 순종을 대신 행하셨고,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불순종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순종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하시고 당하신’ 순종으로 구원받게 하심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눈앞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셔서,
스스로의 공로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 거룩한 절망을 통해 진정한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은 공로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로에 참여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성령에 베풀어주시는 신비적 연합으로써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것이 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우리의 것이 되고(칭의),
그리스도의 아들 됨이 우리의 것이 되고(양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것이 되며(제자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것이 되고(신앙),
그리스도의 순종이 또한 우리의 것이(성화) 됩니다.
십계명 서문이 가르쳐 주는 순종의 유일한 동기와 목적은 이렇듯 오직 ‘사랑’입니다.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어
주를 닮아가는 십자가의 길을 우리 또한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이 사랑의 관계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이 선언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그의 것이고, 그는 나의 것이 되는… 우리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 사랑이 순종이 되고, 그 순종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됩니다.
이것이 십계명 서문이 우리에게 선언하는 복음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의 요구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은혜의 선포 앞에 세워 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