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를 문자 그 자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수요사경회때 강의를 했습니다.
성도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각자의 양심과 신앙을 따라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 영상을 주제별로 10~15분 단위로 잘라 유튜브에 공개했습니다.
애초에 헌금이란 주제는 죄인들의 심령이 민감한 부분인지라 공개를 고민했었으나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6월에 개척하며 유튜브 체널을 운영한 이후 처음으로 부정적인 댓글이 달렸습니다.
요약하자면, 십일조가 지금까지 유효한 이유와, 물건과 제물들을 지금처럼 돈으로 환산할수 있겠느냐,
그리고 십일조가 어째서 신앙고백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자의 말투가 거칠기는 했어도, 생각해보니 어쩌면 헌금에 대하여 설명이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면 영상을 안보실것 같아 생략한 부분들을 설명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께서 댓글을 달아준 질문자의 마음에 평강과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다음주에 그 질문들만 다시 다루어야 하나 생각을 잠시 했지만,
유튜브가 논쟁의 장이 되길 원하지 않고, 혹시나 질문 하셨던 분이 상처입으실까 하여 영상으로 다루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지적해주신 질문들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유익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사경회때 다 설명하지 못했던 내용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내용들을 글로 남기려고 합니다.
아래글은 제가 실제로 유튜브 댓글에 답글로 남겼던 글을 몸통으로 하였습니다.
먼저 십일조와 관련한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시고 이 글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홈페이지의 상단메뉴 <복음편지> 안에 <덮어놓았던 질문들> 에 있습니다.)
저는 헌금이 반드시 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헌금은 신앙고백으로서의 기능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속물이 아니시지요.
때론 헌물이 될수도 있고, 때로는 봉사가 될수도 있습니다.
돈이어야 헌금이라고 생각하거나, 돈이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 헌금, 즉 헌상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이라는 이 말을 조금 신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모세로부터 율법이 있기 전에, 아직 아브라함의 족보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시게 되기도 전에,
족보도 시작도 없는 제사장 멜기세댁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평강의 왕, 정의의 왕인 이 사람을 히브리서에선 예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십일조는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법 중에 의식법이나, 시민법이 아니라, 도덕법, 즉 자연법에 해당합니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고 끝난, 제사와 같은 의식법이 아닙니다.
구원자에 대해서 은유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통치의 방법이 달라지게 되는 시민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의식법이나 시민법이 아니라 자연법입니다.
안식일이 의식법이나 시민법이 아니라 자연법이듯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십일조와 헌금, 헌물, 헌상은 주께 드리는 유비가 됩니다.
같은 자연법인 안식일의 경우를 예로 들께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원래 창조를 기념하여 마지막날에 쉬었었지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의 첫날을 쉬며 예배합니다.
그것은 주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신앙고백이듯,
자연법인 헌금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고백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중간에 구약에서 명령하는 수많은 십일조와 관련한 부분들이나
말라기에서 강조하는 십일조에 대한 부분은 유튜브 영상에서 다루었으니 생략하고 신약으로 넘어가 생각해보려 합니다.
예수님도 마23에서 십일조에 대해 이야기 하신적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신학자들은 마23에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십일조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폐기하신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로 헨드릭슨이라는 사람은 마23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계속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그는 주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기까지만 십일조가 유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음으로 십일조에 관한 율법이 아직 유효하다고 하신 것이지,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한다고 하신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것은 헨드릭슨이 십일조를 그저 율법에서 명령하는 의식법과 시민법의 일환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3:23에서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과거시제이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살려서 의역한다면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 이것도 행하고… 그리고나서 앞으로도 십일조,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것이다” 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 이전에만 국한되어 적용된다고 해석하는 것은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현재형으로 표현하듯이 일상의 원칙이며 진리의 원리를 품고 지속되어 지켜져야 할 유비입니다.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부분과 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음을 삶으로 신앙고백하며 살 수 있다면
돈으로가 아니어도 그것만으로 십일조의 의미를 다 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와 지체들을 섬길 다른 무엇으로도 충분히 신앙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헌금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여겨주십시오.
제가 ‘공동체와 지체들을 위해 섬길 일들에 대한 연장선으로 헌금을 이해해 달라‘고 한것은,
마10:9-15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자비량할 수도 있지만,
또한 복음 사역의 협력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도 합당한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복음 전함에 해가 될까봐 의도적으로 받지 않은 것이므로
오히려 특수한 케이스라고 생각해야하며
바울 스스로도 헌금으로 복음 전하는 자들의 생계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10에서 심지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약속하시고,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경고하기까지 하십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삯을 받아 챙기려는 간악한 무리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몇몇으로 인해 확대적용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온전히 십일조와 헌금을 집행할 수 있도록, 성도들은 장로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의 일에 참여해야하겠습니다.
저는 뉴시티광염교회 성도들이 적은 금액이라도 신앙을 고백하며 헌금하는 생활을 했으면 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