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1장의 마지막 부분엔 하나님께서 소를 재판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이고, 그 고기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짐승의 행동은 도덕적 의미를 담은 행위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는 죽음으로 처벌을 받습니다.
소가 소를 들이받는 경우라면 죽임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들이받아 죽었다면 소는 반드시 죽임당해야 합니다.
받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에게서조차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한 피값을 찾으시고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하십니다(창9:5).

하지만 이 법의 진짜 관심은 들이받은 소가 아니라 소의 임자에게 있습니다.
소가 사람을 들이받은 것은 주인조차 예측할 수 없이 벌어진 사고일 뿐입니다.
그러나 소가 받는 버릇이 있다고 이미 경고를 받은 이후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위험을 알고도 그 주변인들을 지키지 못한 임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가해진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는 위험성을 경고받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험을 방치하여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규례의 판결문은 반복해서 이렇게 끝납니다.
짐승의 값은 배상하되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출 21:34,36).
목축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빗물을 모을 구덩이를 파 놓고 관리하지 못해 짐승이 빠져 죽은 경우에도 판결은 같습니다.
구덩이 주인은 죽은 짐승의 값을 물어 주고, 죽은 것은 자기가 차지합니다.
이때 분명히 관찰되는 공통점은 ‘죽음’은 결코 증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책임자의 것으로 귀속됩니다.
죽은 것이 짐승이면 사체가 그의 것이 되고,
죽은 것이 사람이면 그가 차지하게 되는 것은 그 ‘죽음’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으로 소의 임자에게도 죽음이 판결로 내려지는 것입니다(출 21:29).
그것이 위험성을 알고도 지키지 않은 이가 져야 할 책임으로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위험성을 경고받고도 지키지 못한 이들이 책임져야 할 형벌은, 고의로 벌인 살인의 경우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죽임당해야 할 생명 대신 속죄금을 내고 살아날 방법이 주어집니다.
물론 죽어야 할 소의 임자가 먼저 속죄금의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속죄금의 금액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소에게 죽임당한 이의 가족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가족들의 마음속이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듯한 상황에서,
가족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에서 발원한 은혜의 용서로 베풀어지는 것이 속죄금입니다.
이는 생명의 값을 두고 흥정함이 아닌 사랑과 자비가 정의의 실현 안에서 만나는 결정입니다.
그렇기에 남종과 여종이 소에 받혀 죽은 경우
그들의 주인은 생명을 인질로 삼아 무한대로 값을 올려 받으려 흥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로 엮여 있는 가족이 아니라면
주인이 종의 생명에 대한 속죄금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은 30세겔입니다.
생명의 값은 사랑이 빠진 채로 흥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에 은 30세겔은 충분한 금액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밖에서 웅크리고 있지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하고 말씀하시며 ‘죄를 다스리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가인에게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의 길들여지지 않는 죄성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죄성의 악한 본성을 방치하여
그 뿔로 하나님의 형상을 들이받게 내버려 둔 이들의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배상해야 할 책임입니다.
죽음으로 값을 지불해야 하던 이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속죄금으로 배상하기로 은혜의 처분을 받는 방법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율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길들이지 못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그를 들이받아 십자가에 죽였을 때,
죽임당하신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선 유가족만이 허락할 수 있는 속죄금 처분으로써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값은 흥정할 수 없기에,
속전의 문은 열려 있어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없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8).
그저 규례대로 그의 죽음이 책임자인 우리의 몫이 될 뿐입니다.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
그런데 바로 이때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은혜가 발동됩니다.
그가 우릴 위해 내어주신 그 죽음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흘리신 피이기에,
그 죽음의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엄청나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줄 알았던 생명의 속량값을 모두 갚아 버립니다.
우리 앞으로 청구된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가 흘리신 그 보혈이,
우리 앞에 놓인 생명값을 온전히 지불하고도 남았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막 10:45).
이 ‘대속물(뤼트론)’이란 ‘속죄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값을 두고 흥정하던 사람들은 그분의 값을 사랑으로 엮이지 않은 종의 값으로 깎아내렸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의 피 값으로 우리의 무한한 빚을 청산하셨습니다.
모자란 값에 팔리셔서, 남는 값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실제적으로 우리 것이 되어야,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질 때
그분은 우리를 생명으로 걷게 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