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특별한 거절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한 남자가 아직 약혼하지 않은 여인을 꾀어 동침한 경우를 하나님이 직접 언급하셨습니다(출 22:16).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된 ‘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타’는 마음을 열게 했다는 뜻입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약혼한 여인을 강제로 범한 사건이었다면 사형이었을 테지만(신 22:25),
이 경우엔 서로 마음이 맞아 벌어진 일이었기에
율법은 그 남자에게 납폐금을 내고 여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책임지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마련해야 할 신부값은 몇 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은 오십 세겔입니다(신 22:29).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를 살리려면 다시 물속에 넣어주어야 하듯,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남녀의 관계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속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남자에게는 이 결혼을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도 전에 먼저 부부 관계의 울타리를 넘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두 사람에게 혼인의 권리를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여자의 아버지에게는 두 사람의 혼인을 거절할 권리가 있었습니다(출 22:17).
딸 가진 아버지라면 이 상황에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혼인이 성사되든 무산되든, 그 결정은 여전히 아버지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만약 이 조항이 없었다면,
율법은 부모가 반대하는 연애의 훌륭한 출구 전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모의 뜻을 자기들의 결심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 욕망으로 울타리를 넘어서는 일을 자행하였다고 해서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를 뛰어넘는 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월권은 권리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권위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결정하는 권력의 자격이 아닙니다.
권위란 결정의 결과를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책임을 회피한 채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만을 요구할 뿐입니다.
내 뜻을 가로막고 있는 ‘권위’의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라면 부당한 방법도 서슴지 않습니다.
죄악된 본성은 허락을 구하기보다 저지른 뒤 용서를 구하는 편이 쉽다고 판단합니다.
먼저 울타리를 넘어 일을 벌여 놓고선,
짊어져야 할 책임을, 누려야 할 권리인 듯 뒤바꾸려 합니다.
용서받을 것을 계산하며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볼모로 잡은 사용입니다.
남자가 진정 여자를 사랑했다면 납폐금을 들고 가 먼저 혼인의 허락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 10:1).
우리도 강도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시고 막으시면, 내 뜻대로 저질러 버립니다.
하나님을 내 결정에 끌고 오기 위해 울타리를 넘어버립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순종의 이유가 아니라 불순종의 인질이 됩니다.
성경은 아버지가 왜 거절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거절이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같은 동사를 반복하여, 아버지가 “거절하고 또 거절한다”고 말합니다.
이 거절은 결코 가벼운 결정일 수 없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혼인을 거절한다는 것은 딸이 감당해야 할 수치와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짊어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어쩌면 평생 딸을 책임져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손상되어버린 자신의 명예만 생각한다면 납폐금을 받고 딸을 보내는 편이 훨씬 쉬웠을 겁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거절했다면,
그것은 딸의 과거보다 앞으로의 삶을 더 깊이 염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울타리를 넘어 탐욕과 죄에 결합했던 사람들입니다.
유혹하는 자의 말에 마음을 열어주고, 그를 따라 제 발로 울타리를 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욕망을 사랑하여, 사망의 권세를 따르던 우리였습니다.
율법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한몸이 되어 버린 그 죄와 함께 영원히 사망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어야 했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그 결합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게 넘겨주는 일을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권력을 부리려는 권위가 아니라 책임지려는 사랑의 권위입니다.
사랑이란, ‘언제든 허락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사랑은 우리 앞을 막아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빼앗아 갈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잘못을 눈감아 주는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길을 막아서고 그 사람의 미래까지 짊어지는 책임이 곧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때로 그 앞을 막아서야 합니다.
어디로 가든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절로 지켜진 우리에게 참 신랑이 오셨습니다.
그는 울타리를 넘지 않으시고 문으로 들어오셨습니다(요 10:2).
유혹자는 먼저 월권하여 훔치려 하지만, 참된 신랑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부값을 먼저 치르셨습니다.
은 오십 세겔이 아니라 자신의 피값으로 말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2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수치를 가리시기 위해 벗김을 당하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몸을 찢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를 책임지시는 사랑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의 모든 요구에 “예”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실 테지만,
그 권위 안에 거하는 이들의 인생을 사랑으로 책임져 주실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