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수많은 이단 중에 가장 광범위하게 활동하며 영향력을 끼쳤던 분파가 있다면 단연 할례파일 것입니다.
할례파의 주장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고민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두 입장 모두를 만족하게 해 줄 수 있을 만한 내용으로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신앙을 깨끗이 저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갖는 일보다는,
유대교의 신앙을 이탈할 일 없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되는 할례파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비교적 손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할례파는 족보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혈통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모든 신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율법에 순종하여 자신의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유대교의 내용을 그대로 기독교에 끌고 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할례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진짜 이스라엘인이 되어
율법에서 명령한 모든 것을 순종함으로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지켜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을 ‘이방인에게 유대교인이 될 기회를 제공해준 선지자’ 정도의 역할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도 계속하여 유사하게 제기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순종이라는 자신의 공로로 그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혹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얻은 구원이라도 취소될 수 있다는 이러한 유대교식 행위 구원론을
조금 어려운 말로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어디가 잘못된 것이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단지 구원에 이르게끔 도와주시는 분으로서
마지막 결정은 내게 달려있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복음을 훼손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나의 허락 없이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은데,
이는 곧 주께서 나를 구원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의 결정권자는 ‘나’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후 나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도 나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에 달려있으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를 구원할 자는 결국 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자력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돕는 분이요,
성령님은 그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일 뿐,
실제적 구원자는 자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러니까 아직 그리스도를 먼저 선택하거나 사랑하기도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죄인이던 나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나의 믿음이 나를 구원한 것처럼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그 믿음을 순종이라는 것으로 더욱 갈고 닦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온전한 구원의 자격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의 그릇된 열심의 행위로 말미암아 오히려 행위로는 주를 부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